[한국농어민신문] 

우리 사이에 안전한 울타리를 만드는 일은 서로 마음을 꺼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이다. 그 울타리 안에서 만큼은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내가 아니라, ‘그냥 나’이면 충분하길 바라고 있다.

ㅣ 김예슬(서와)/청년농부·경남 합천

내가 살고 있는 합천에서 만난 친구들이 있다. 청년이 보기 드문 동네다 보니 우리는 자연스레 친구가 됐다. 어느새 친구들을 만난 지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친구들이 합천과 도시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지금처럼 가까워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친구들은 계속 도시와 농촌을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했다. 농촌에 살고 싶지만 농촌에서 무얼 하며 살지, 어떻게 자립할 수 있을지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너는 어떻게 네가 농사짓고 싶다는 걸 알았어?” 친구가 나에게 질문했다. “10대 때, 여행 다니면서 농사를 경험해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시간이 참 좋았어.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 나는 살아 있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어. 그래서 시작하게 된 거지. 농사를 짓다 보니 농부라는 자리에 더 많은 의미를 담아 가게 된 거야”하고 대답했다. “너는 네가 뭘 좋아하는 사람인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아”하고 말을 뱉은 친구는 왠지 더 깊은 고민에 빠진 것 같았다.

자립을 고민하던 친구들은 아르바이트 자리도 꽤 많이 알아본 모양이었다. 어떻게 친구들을 도울 수 있을까? 먼저 농촌에서 살기 시작한 사람으로서, 또 친구로서, 따뜻한 곁이 되어 주고 싶었지만 나한테도 뾰족한 수가 없어 미안한 마음이었다.

밭에 앉아 풀을 매고 있으면, 자꾸 친구들 생각이 났다. 오래 고민을 하다가 ‘어떤 일, 어떤 직업을 가질지 보다 왜 농촌에 살고 싶은지, 어떤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지가 더 먼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살아가기를 바라는지 고민하다 보면, 어떤 길이 보이지 않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농부라는 직업을 가지고 싶었던 사람이 아니었다. 첫 씨앗을 뿌릴 때만 해도, 내가 농부가 되어 여덟 번째 봄을 맞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내가 가진 결을 잃지 않고, 살아 있는 일을 하며, 자연스럽게 살고 싶을 뿐이었다.

문득 ‘MBTI’라는 도구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MBTI는 마이어스(Myers)와 브릭스(Briggs)가 융(Jung)의 ‘심리 유형론’을 바탕으로 정리한 성격 유형 검사다. 성격 유형을 16가지로 나누어 정의하고 있다. 이 기준으로 ‘너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결론짓는 것은 아니다. 나는 어떤 생각과 마음의 길을 가진 사람인지, 내가 가진 어떤 기질이 나를 이렇게 행동하게 만드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이다.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가 서로 편안하게 쓰는 손이 다른 것처럼 사람마다 고유하게 가진 결이 있는 것이다.

MBTI 강사인 엄마 덕분에 나는 어릴 때부터 MBTI를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내가 어떤 유형을 가진 사람인지 알고 있다는 것은, 나 스스로를 조금 더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바라볼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었다. 친구들에게도 자신이 바라는 삶을 고민하기 위해서는 ‘나’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고 바라볼 기회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친구들과 MBTI 모임을 열어보고 싶다는 제안을 흔쾌히 받아주셨다. “청년들 이야기를 가까운 자리에서 들을 기회가 생긴다는 건 멋진 일이지!”라고 하셨다. 친구들도 함께 공부해보면 좋겠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지난 5월부터 MBTI 모임을 시작했다.

5월에는 주마다 만나 공부를 하다가 6월부터는 2주에 한 번씩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내어 보여도 괜찮은, 안전한 울타리를 세워 가는 중이다. 우리 사이에 안전한 울타리를 만드는 일은 서로 마음을 꺼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이다. 그 울타리 안에서 만큼은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내가 아니라, ‘그냥 나’이면 충분하길 바라고 있다.

자립하기 위해서 당장 구해야 하는 것이 일자리 아니라 질문이 되길 바라는 건 너무 이상적인 생각일까? ‘나는 어떤 결을 가진 사람이지, 무얼 좋아하고, 무얼 싫어하는지, 무엇이 쉽고, 무엇이 어려운지, 무얼 소중하게 하게 여기는지, 무얼 지키며 살고 싶은지.’ 스스로 삶을 세우기 위해서는 그런 질문이 먼저가 아닐까? 나는 이런 질문들이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언젠가 찾아오는 것이라 믿고 있다. 

‘나’를 이해하는 공부가 당장 자립을 해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돈을 벌어다 줄 리도 없다. 하지만 다음 한 걸음을 걸어 나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이라 생각한다. 친구들과 이 시간을 잘 지나고 싶다. 어떤 질문이 나에게 찾아왔을 때, 잠깐 멈춰 서도 괜찮다고 서로에게 말해줄 수 있는 사이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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