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슬(서와)/청년농부·경남 합천

[한국농어민신문]


청년들에게 소농이 가지는 힘과 가치를 알아갈 수 있는 교육도 필요하다. 자연에 기대어 작은 생명들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농부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농촌이 건강하게 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


김장할 때 필요한 생새우와 굴, 청각 같은 해산물을 사러 차를 타고 삼천포에 가는데 발끝이 으슬으슬 시렸다. 창문을 연 것도 아닌데 차가운 바깥바람이 차 안으로 숭숭 들어오고 있었다. 다음 날 진주에 있는 자동차 정비소에 차를 보이러 갔다. 진주로 가는 길에 어머니가 차문을 손으로 쓸면서 “돈 많이 까먹지 말고 온나”라고 하셨다. 정비소 사장님이 간단하게 고칠 방법을 찾으려고 살펴보았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수리를 하려면 자동차 한 쪽을 뜯어내고 부품 전체를 갈아야 했다. 꽤 큰돈이 드는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 한숨소리가 차가운 바깥바람처럼 크게 들렸다. 올해는 농사가 잘 되지 못한 작물이 많아서 수입도 적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목돈을 쓸 일이 자꾸 생기다 보니 마음이 무거웠을 것이다. 부모님이 힘들 때 턱 내어놓을 돈이 있으면 좋을 텐데, 이럴 땐 내가 농부라는 게 안타깝다. 돈으로 대단한 걸 누리겠다는 게 아닌데, 돈 때문에 한숨 쉬어야 할 때가 생기면 마음이 씁쓸해진다. 소농들은 농사가 잘 되지 못하면 생계와 바로 이어진다. 소농으로 농사를 짓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봄에 농사 계획을 짜면서 한 해 수입을 함께 생각한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생활비와 쉼이 필요할 때 쓸 여행비 정도를 계획한다. 하지만 농사는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보니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다. 해마다 심해지는 폭염과 가뭄은 농부들을 더 힘들게 한다. ‘가을걷이를 마치고도 보릿고개를 넘지 못하는 건 농사를 잘 못 지은 농부 탓일까? 이것이 농부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일까?’ 가을걷이를 하고 나면 해마다 비슷한 고민이 남는다.

요즘 많은 사람이 ‘워라밸’이라는 말을 쓴다.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를 줄인 말로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뜻이다. ‘시골’이라 하면 ‘쉼과 여유’를 많이 떠올리지만, 소농인 농부는 일과 삶을 균형 있게 맞추기가 쉽지 않다.

고구마를 캐기 시작한 날로부터 생강을 수확해 생강차를 만들고, 양파와 마늘을 심고, 틈틈이 콩을 털고, 무와 절인 배추를 팔고, 우리 집 김장을 하기 까지 바쁜 날이 이어졌다. 추운 날씨에 배추를 절이고, 씻고, 포장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우리 집 김장까지 마치고 나면 정말 김치 한 쪽이 얼마나 귀하게 보이는지 모른다.

그래도 이 정도 일은 뿌듯한 마음으로 기분 좋게 할 수 있는 가을걷이다. 그렇게 김장을 마치고 푸근하게 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우리 식구들은 다시 곶감 깎는 일을 시작해야 했다. 무리가 되는 줄 알지만 수입이 없는 겨울을 위해서 해마다 곶감을 만들고 있다. 올 봄에 식구들에게 농사에서 수입을 조금 더 내고, 곶감 만드는 일은 하지 말자고 이야기 했다. 하지만 가을걷이를 마치고 나서 그 말이 쏙 들어가고 말았다.

나는 자연과 더불어 땅을 일구어가는 삶을 계속 살고 싶다. 삶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누리면서 말이다. 내가 왜 농부로 사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농사로 돈을 벌려면 비닐하우스 같은 시설을 짓고, 기계화를 시키고, 농사 규모를 넓히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작아야 지킬 수 있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 대농처럼 규모가 커질수록 놓치는 것이 많아지고, 거대한 크기만으로 작은 생명에게는 위협이 될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내딛는 걸음에 작은 개미들이 밟히는 것처럼 말이다.

며칠 전, ‘미국 뉴욕에서 농촌에서 일하는 소농들의 권리에 관한 UN선언이 다수결로 채택 되었다’라는 신문 기사를 읽었다. 세계에서 소농이 가진 가치와 역할을 인정하고, 보호하기 위한 움직임이 생긴 것이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는 기권 표를 던졌다니 마음이 씁쓸하기도 했다.
다양한 생물이 살아갈 수 있도록 땅을 살리는 일과 종자를 이어가는 일은 ‘소농’이라서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소농들이 지키고 있는 것은 자기 재산과 이익만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규모가 작고, 소농으로 땅을 일구는 농부가 적다는 이유로 지원과 정책에서는 언제나 뒤로 밀려난다. 더구나 소농은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는 일이 많은데, 그 땅으로 나오는 지원금은 땅주인에게로 들어가는 일이 흔하다. 거의 모든 일이 서류로 이루어지다 보니 지원이 필요한 대상을 제대로 찾는 일도, 소농을 구분하는 일도 어렵다.

기반 없이 농사를 시작하는 청년들은 소농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청년들에게 소농이 가지는 힘과 가치를 알아갈 수 있는 교육도 필요하다. 자연에 기대어 작은 생명들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농부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농촌이 건강하게 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

나뭇잎을 떨어뜨린 겨울나무처럼 나도 가득 안고 있던 일을 하나하나 떨어뜨리고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가지 사이로 숭숭 들어오는 찬바람에 마음이 움츠러드는 날도 있다. 그럼에도 봄에 심을 씨앗을 가려서 소중히 담아 두는 것은 내가 지켜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부디 새해에는 비슷한 고민을 여전히 안고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청년 농부로 살아가는 내가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다음 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은 세상에서 말이다. 다음 걸음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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