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슬(서와)/청년농부·경남 합천

[한국농어민신문]

끊임없는 개발로 지역은 원래 모습을 잃어 가고 있다. 지역이 한 번 놀러 가고 말, 소비 거리가 되어 버린다면 누가 이곳을 소중히 지키려고 할까? 우리 마을에 더 넓은 길이나 관광객을 위한 편의시설이 지어지기보다, 마을 사람들이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가지, 토마토, 고추, 파프리카 씨앗에 싹을 틔우는 것으로 봄 농사가 시작된다. 먼저 물에 적신 헝겊에 씨앗을 싸서 싹을 틔운다. 그리고 싹이 난 씨앗을 상토에 옮겨 심어 모종으로 키운다. 씨앗을 심은 상토에서 새싹이 빠끔 고개를 내밀면 나도 슬슬 몸을 깨운다.

겨울을 보내고, 오랜만에 밭에 나갔다. 마늘과 양파밭에 풀을 매고 웃거름을 주었다. 무사히 겨울을 지나온 마늘과 양파를 응원하며 정성껏 웃거름을 뿌렸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며 나도 모르게 봄기운이 느껴지는 바람에 마음이 설렜다. 코로나로 온 세상이 어수선한 가운데도 제때 찾아와 준 봄이 고마웠다.

한창 일을 하고 있는데 빨간 깃발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한두 개가 아니었다. 도로를 따라서 쭉 꽂혀 있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을 이장님께 물어보았다. 도로를 넓힐 구역을 표시해둔 깃발이라 했다.

우리 마을은 합천 황매산 자락에 있다. 주말마다 등산객들이 찾아오고, 5월에 철쭉제가 열리면 많은 관광객이 몰려드는 곳이다. 황매산으로 올라가는 도로가 우리 밭과 마을을 지나간다. 그래서 철쭉제가 열릴 때면 차가 많이 막힌다. 차로 십오 분이면 올라갈 길을 몇 시간에 걸려 가기도 한다. 철쭉제가 열리는 주말이면 마을 주민들도 차를 몰고 나가기를 피한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도로를 넓히는 공사를 한다고 했다.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필요하다. 하지만 ‘잠시 왔다 떠나는 관광객에게 우리 삶터를 맞추는 것이 옳은 선택일까?’ 질문하게 된다. 철쭉제가 열리는 것은 고작 이삼 주뿐인데 말이다.

깃발이 꽂힌 길을 따라 걸어보았다. 깃발은 도로를 따라 심겨 있는 나무 뒤에 꽂혀 있었다. 길을 넓히기 위해서 나무를 다 베어 낼 것이라는 의미였다. 우리 마을에서 황매산까지 올라가는 길 양쪽에는 벚나무가 심겨 있다. 처음 이 마을에 왔을 때만 해도 나무가 많이 어렸다. 지금은 양쪽 나무의 가지와 가지가 맞닿아 벚꽃 터널을 만들 만큼 크게 자랐다.

해마다 벚꽃이 떨어지는 길을 따라 밭을 오가는 봄을 기다린다. 봄 농사는 거름 포대를 나르고, 삽질과 괭이질을 하며 밭을 일구어야 해서 힘이 많이 든다. 한창 일하느라 몸이 지칠 즈음, 이웃들과 틈을 내어 벚꽃 길을 따라 소풍하는 재미도 있다. 하지만 도로 확장 공사를 하고 나면 설레는 기다림은 사라질 것이다. 도로가 넓어지고 난 뒤 풍경을 상상해 보았다. 마음이 짠했다.
많은 관광객을 모으기 위해 지역마다 다양한 축제와 관광지를 개발하고 있다. 펜션 단지가 되어 버린 마을도 흔하다. 마을을 오가다 보면 포클레인이 산을 뒤엎고 있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해마다 많은 땅이 파헤쳐진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마을을 뒤엎는 이유가 마을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닐 때가 많다. 크게 보아 지역 경제 개발을 위한 것이라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개발’이라는 단어를 새롭게 정의해야 하지 않을까?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일이 건강한 지역을 만드는 해답이 될 수 없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있던 것을 뒤엎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때 개발이라는 말을 썼다. 하지만 무분별한 산업 개발은 우리에게 ‘기후 위기’라는 안타까운 결과를 안겨 주었다. 이상 기후는 농사를 지으며 해마다 더 가까이 느껴진다. 가뭄과 때 아닌 장마, 견디기 힘든 폭염을 겪다 보면 무서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삶에도, 세상에도 새로운 것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 끝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기보다, 시간을 들여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데 더 많은 애를 써야 한다. 지구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이 만들어졌다. 자연을 자원으로 여기며 파괴하는 일을 이제 멈추어야 한다.

개발은 무엇인가를 조금 더 쓸모 있고,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킨다는 의미다. 시대마다 ‘개발’이라는 말에 담기는 의미가 달리질 수 있겠다.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에게는 ‘지속 가능한 개발’이 필요하다. 있는 것을 뒤엎는 개발이 아니라, 있는 것을 지키는 개발이 필요한 때다. 우리 삶터를 망가뜨려 지역 경제를 개발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것을 ‘개발’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끊임없는 개발로 지역은 원래 모습을 잃어 가고 있다. 지역이 한 번 놀러 가고 말, 소비 거리가 되어 버린다면 누가 이곳을 소중히 지키려고 할까? 우리 마을에 더 넓은 길이나 관광객을 위한 새로운 편의 시설이 지어지기보다,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이야기가 지역이 가진 귀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어딜 가나 비슷하게 있는 축제나 관광지가 지역을 살리는 길이 될 수 없다. 삶이 있는 곳에 이야기가 쌓인다. 이야기가 있는 곳에 사람들의 발길이 닿고, 머물게 된다.

아무쪼록 농촌이 귀하게 여길 가치가 있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역을 건강하게 하는 것은 잠시 왔다 떠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곳에 머물러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가진 가치가 무엇인지 깨닫고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이야기가 있는 마을에서, 그 이야기에 기대어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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