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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2030, 그들이 사는 법] ‘산불조심 방송’이 불편했던 이유

[한국농어민신문]

청년농부 김예슬

봄 농사가 시작되면 밭에서 하루를 보낸다. 손수레에 거름을 실어 두둑에 뿌리고 한 삽 한 삽 뒤엎다 보면 봄이 왔다는 것이 진하게 느껴진다. 고맙게도 해마다 힘과 체력이 좋아지고 있다. 이제는 무거운 거름 포대를 혼자 들어 올리는 일도, 두둑을 뒤엎는 삽질도 꽤 할만하다. 쉬엄쉬엄 몸을 풀어가며 일하는 요령도 생겼다. 조금 더 단단해진 몸을 느끼며 기분 좋게 봄 농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한 번씩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바로 ‘산불 조심 방송’이다. 방송차가 마을 마을을 돌아다니는데, 밭에서 일을 하다보면 산불 조심 방송을 흔하게 들을 수 있다.

“군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산골 방지 대책 본부에서 당부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날씨가 건조하여 산불이 나기 쉬운 계절입니다. 산림과 가까운 백 미터 이내에서는 논밭두렁이나 농사 폐기물을 태우지 맙시다”라는 말로 방송이 시작된다. 농사 폐기물이라고 하면 ‘비닐포대, 비닐멀칭, 플라스틱 농약 통’ 같은 것들이다. 이런 농사 폐기물을 산과 먼 곳에서는 마음대로 태워도 된다는 말인가? 방송을 들을 때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휘젓게 된다.

하지만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방송은 이걸로 끝나지 않는다. “부녀자와 노약자가 화기 취급을 못하도록 지도합시다”라는 말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방송을 할 수 있는지 들을 때마다 놀랍다. ‘부녀자’는 모든 여성을 이르는 말이다. 그렇다면 방송에서 말하는 여성을 지도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방송에서 말하는 ‘여성을 지도하는 사람’이 ‘남성’을 가리킨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인정할 것이다. 산골마을에서 여성은 여전히 남성에게 지도 받고, 통제 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날마다 듣는 방송이 불평등한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그런 이유로 지난해에 산불 조심 방송을 바꾸어 달라고 군청에 민원을 넣었다. 올해는 이미 녹음이 다 되었으니 내년에 바꾸겠다는 답을 받았다. ‘어차피 바꿀 거라면 이 불편한 방송을 왜 한 해 동안이나 더 들어야 할까? 말 한 마디가 만들어 낼 무수히 많은 불평등은 생각하지 않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다.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바꾸지 않겠다는 것보다는 낫다는 마음으로 한 해를 버텼다.

여름이 지나 다시 산불 조심 방송이 시작 되었을 때 처음부터 끝까지 방송을 집중해서 들어보았다. 여전히 불편한 방송은 계속되고 있었다. 다시 군청에 연락을 해 보니 올해 새로 녹음기를 단 차량은 방송이 바뀌었지만 지난해에 녹음기를 단 차량은 그대로 방송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일일이 바꾸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는 대답이었다. 녹음기를 새로 다는 비용과 번거로움을 더 큰 문제로 여긴다는 것이 답답했다.

마을 회관에서 할머니들이 밥을 짓고, 할아버지들은 방 안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풍경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따지고 보면 보통 밥을 짓는 것은 여성인데 화기취급을 못하게 지도하라는 것은 말이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방송을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남성은 지도하고, 여성은 통제 받는다는 것이 어르신들에게는 크게 불편한 일이 아니다. 그분들이 살아온 시대가 그러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농촌에는 젊은 세대도 살고 있다. 많은 청년이 여성과 평등과 자유에 대해 고민하고 있고,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불평등에 분노하고 있다. 그런 청년들이 날마다 이런 방송을 들어야 한다면 어떻게 농촌에 살 수 있을까?

별 대수롭지 않은 일에 너무 예민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불평등에 무뎌진 세상인 만큼 예민한 시선으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가 ‘늘 쓰는 말’은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생각이 되고, 관계가 되어 삶 속에 깊이 들어온다. 강대국이 식민지를 다스릴 때 ‘언어’부터 통제하려 한 것도 말이 정신이 되고, 국가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말이 가진 힘은 크다.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게 써 온 말들이 우리 삶과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되짚어 보아야 한다.

다행히도 평등한 언어를 쓰기 위한 노력이 일어나고 있다. ‘여의사, 여배우, 여경’처럼 직업 앞에 붙는 ‘여’라는 말을 빼기로 했다. 그리고 ‘처녀작’은 ‘첫 작품’으로 ‘유모차’는 ‘유아차’로 바꾸었다. 인구 문제에 대한 책임이 여성에게 있다고 느껴질 수 있는 ‘저출산’이라는 말 대신 ‘저출생’이라는 말을 쓰고, ‘미혼’ 대신 ‘비혼’이라는 말을 쓴다. 이렇게 늘 쓰는 말을 하나씩 평등한 언어로 바꾸어낼 수 있다면, 우리는 어제보다 조금은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무엇보다 많은 사람에게 읽혀지는 글이나 방송이라면 더욱 조심해서 말을 선택할 책임이 있다. 하루빨리 이 불편한 방송을 그만 듣게 되기를 바란다. 그런 마음을 담아 산불 조심 방송을 다시 써 보았다.

“군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산불 방지 대책 본부에서 알려드립니다. 지금은 날씨가 건조해서 산불이 나기 쉽습니다. 숲은 온 생명이 기대어 살아가는 터전입니다. 우리 삶을 지켜준 숲이 늘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산불을 조심합시다. 농사 폐기물과 논밭두렁을 함부로 태우는 것은 아이들에게 물려줄 자연을 해치는 일입니다. 아이들이 더불어 살아갈 자연을 아름답게 물려주기 위해서 농사 폐기물을 함부로 태우지 말아야겠습니다. 산불이 났을 때에는 바로 군청이나 읍면사무소, 또는 경찰관서로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빠른 신고는 산불 피해를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사람도 숲이 내어준 산소로 숨을 쉬며 살아가는 작은 생명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산불 방지 대책 본부에서 알려드렸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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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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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숙자 2019-04-06 12:32:16

    저는 경기도에사는 사람인데 한번씩 밀양에 내려갑니다 자주들려오는 산불조심방송이 정말어이가없더라구요(부녀자들과아이들이 화기취급을 못하도록 합시다!) 만일에 저방송이 시골이아니라 도심에서 방송했다다면 어떤일이 일어날까 생각해봤어요 한번은 너무귀에 거슬려서 밀양시청 산림과에 전화했더니 박사들의 통계자료가 부녀자들이 논두렁을 태울때 불을많이낸다고 하더라구요 우리 시골에서는 논두렁태우는 일은 보통 남자들이하는일인데 그것도 이해가안가요 밀양시에서만 하는게 아니라 전국적으로 방송한다는게 더 충격입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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