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슬(서와)/청년농부·경남 합천

[한국농어민신문]

지구는 이미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더는 버티기 어렵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금처럼 피부에 와 닿는 위험이 있기 전까지 그 신호를 외면했다. 그렇게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인간 중심’으로 만들어 살아왔다.

코로나19로 사람들과 만나는 거의 모든 일정이 미루어지거나 취소되었다. 벌써 며칠째, 가족들 말고는 다른 만남 없이 집과 밭만 오가고 있다. 지난 폭우로 흙이 쓸려 내려가 콩밭에 깊은 골이 파였다. 살짝 경사가 진 밭이라 물이 한쪽으로 빠져나가면서 땅이 깊이 파인 것이다. 깊이 파인 구덩이 때문에 세워 놓은 울타리도 기우뚱 아래로 내려앉았다. 폭우 피해가 있는 곳을 다 손보지 못했는데 8호 태풍 바비와 9호 태풍 마이삭 그리고 10호 태풍 하이선이 차례로 지나갔다. 태풍 마이삭이 지나가기 전, 구덩이가 더 깊이 파이지 않도록 대책을 세워야 했다. 심어 놓은 작물이 있으니 굴삭기 같은 큰 기계가 들어가기는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손수레에 구덩이를 채울 돌과 흙을 실어 날랐다. 식구들과 쉴 새 없이 삽질을 했다.

하지만 손수레에 한가득 담은 흙을 구덩이에 부어 보아야 별로 표시도 나지 않았다. 한참을 흙과 돌을 실어 나르고 붓기를 계속했다. 우리 밭 옆을 지나던 이웃 농부님이 “무슨 전투 부대 같아. 쉬엄쉬엄해요. 골병들어”라고 하셨다. 전투 부대라니. 느릿느릿한 우리 식구랑 참 안 어울리는 말이다 싶었지만, 그때 모습은 딱 그랬다. 그날 오후에도 비가 온다는 소식이 있어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날씨는 농부에게 폭우로 잠기고 쓸려간 땅을 다시 회복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 가운데 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했다. 더는 아무 일이 없기를 기도하며 태풍을 지나 보냈다.
바쁘게 밭을 오갈 때는 몰랐는데…. 비가 오는 날 내 안에서 겁내고 있는 마음 하나를 찾았다. 빗소리가 무서웠다. 쏟아지는 비가 내 마음에 차오르는 것만 같았다. 지구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걸까? 분명한 것은 지구도, 내 마음도 이제 괜찮지가 않다는 것이다.

지구는 이미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더는 버티기 어렵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금처럼 피부에 와 닿는 위험이 있기 전까지 그 신호를 외면했다. 그렇게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인간 중심’으로 만들어 살아왔다. 기후위기를 온몸으로 겪으며 농사지으면서도, 내 손에서 버려지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어쩔 수 없을 때가 있다.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걸까? 왜 다른 선택지는 없을까?’ 내 손에서 쓰레기가 버려질 때마다 나는 겁이 난다. ‘지금 내가 버리고 있는 게 무엇일까?’하고….

하지만 그 가운데 마음을 단단히 먹는 것은, 나처럼 지구가 보내는 신호를 두려워하며 무어라도 바꾸어 내려고 함께 애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까이 사는 몇몇 농부님들과 기후위기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눈다. 그 뒤로 농부님들은 일상에서 그리고 농산물을 포장할 때, 일회용 쓰레기를 만들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쓰신다. “땅을 살린다고 제초제도 안 치고, 비닐도 안 쓰고 농사짓는데, 그렇게 농사지은 농산물을 비닐에 싸고, 플라스틱에 담아가 보내면 무슨 소용이겠노”하시면서 말이다. 사실 농부에게 어려운 선택이다. 비닐에 싸지 않으면 쉽게 시들고, 달리 대신 쓸 만한 포장 재료를 찾기도 어렵다. 있다고 해도 포장 값과 포장에 들어가는 노력이 곱으로 들 때가 많다. 그럼에도 지구를 위한 선택을 해 주시는 농부님들이 곁에 있어서 힘이 된다.

그리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을까?’하는 내 고민에 새로운 선택지 하나가 생겼다. 경남 진주에는 ‘진주텃밭’이라는 로컬푸드 협동조합이 있다. 안전한 먹거리를 고민하며 지역 농부들의 농산물을 판매하는 곳이다. 조합원인 어머니를 통해서 진주 텃밭에서 농산물 무포장 판매를 시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포장 없이 진열된 농산물을 소비자들이 바로 장바구니에 담아가는 매장이다. 꼭 묶음 포장이 필요하다면 농산물을 노끈으로 묶거나 커다란 토란잎이나 호박잎에 싸서 판매한다. 여러 잡곡 종류와 샴푸나 주방세제도 용기를 들고 와서 필요한 만큼 사 갈 수 있다.

아직은 사람들에게 낯선 매장이다. 마트에 가면 아무렇지 않게 쌓여 있는 플라스틱과 비닐, 스티로폼이 당연하다. 진주텃밭도 이런 시도를 하루아침에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생산자 농부들의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비닐에 싸지 않으면 금방 시들 것, 소비자들이 이것저것 고르느라 과일을 만지다 보면 쉽게 물러질 거라며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매장을 이용하는 소비자들도 조금은 낯선 풍경에 불편한 내색을 했을지 모른다. 지구를 위한 선택은 사람이 편리한 것에 중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도가 왜 필요한지 이야기하며 조율해 가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생산자와 소비자들에게 말을 걸며 첫걸음을 떼어 준 진주텃밭이 고맙고 고마웠다.

내가 살고 있는 합천에서 차로 한 시간쯤 거리에 진주가 있다. 이따금 시내 볼일을 보아야 할 때면 진주로 나간다. 차로 한 시간을 가야 한다는 것이 걸리기는 하지만, 볼일을 보러 진주에 나가는 길에 진주텃밭 매장에 다녀올 수는 있을 것이다. 너무 멀지 않은 곳에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이 하나 늘었다.

글을 쓰는 지금도 비가 내리고 있다. 태풍이 지나고도 소나기가 자꾸 비를 뿌리고 간다. 나는 지구가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를 끝까지 겁내고 싶다. 가만히 겁만 먹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마음을 단단히 먹는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함께 겁내 주시기를. 지구가 보내는 신호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지구를 위한 선택도 늘어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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