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슬(서와)/청년농부·경남 합천

[한국농어민신문]


합천군 가회면에 온 지도 어느새 6년차가 되었다. 동네 길을 걷다 보면 곳곳에 추억이 묻어 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마을에 와서 이곳을 ‘우리 동네’라고 느끼고 정을 붙일 수 있었던 것은 ‘좋은 만남’ 덕분이다.


아버지가 전도사일 때, 우리 집은 이사를 자주 했다. 아버지가 목사가 되기 전에는 섬기는 교회를 옮겨 다닐 수밖에 없었다. 나는 창녕 동포 초등학교 1학년에 들어갔다. 2·3학년은 경산 부림 초등학교에 다녔고, 4·5학년은 포항 흥해 남산 초등학교에 다녔다. 6학년은 경주 유림 초등학교를 다니고 졸업을 했다.

“쟤야, 쟤, 새로 온 전학생.” 나는 조용한 아이였지만 학교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친구들은 일이 년마다 집이 바뀌어서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유치원 때 이야기 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나도 소꿉친구가 있으면 좋겠다. 추억이 있는 동네가 있으면 좋겠다.

스무 살이 되어서 농부가 되었다. 합천군 가회면 작은 산골 마을에 산 지 오 년이 넘어간다. 봄에는 돌담 밭에서 보이는 살구꽃, 매화꽃, 목련꽃과 인사를 나누고, 여름에는 풀매는 나한테 “후꾸보꼬, 후꾸보꼬”하고 말을 거는 새를 만난다. 해마다 찾아오는 친구 이름도 몰라 후꾸보꼬 새라고 마음대로 이름을 지었다. 가을에는 지난해 수수 걸었던 자리, 올해도 수수 걸어 말리고, 다람쥐보다 먼저 도토리 주우러 다닌다. 겨울에는 높은 밤하늘 올려다보면서 별에게 말한다. “나 여기 있어요.”

합천군 가회면 작은 산골 마을, 이제 여기가 우리 동네다. 나를 알아주는 꽃, 새, 나무, 바람, 별이 사는 여기가 우리 동네다. 이제 어디로 떠나도 돌아올 곳이 있다. 폭 안겨 쉬어 갈 곳이 있다. 여기, 우리 동네에 추억이 살고 있다.

위 글은 내가 쓴 ‘여기, 우리 동네’라는 산문시이다. 지난 해 여름, 밭에서 풀을 매면서 “후꾸보꼬, 후꾸보꼬”하는 이름 모를 새소리를 듣고 내 마음에 찾아온 이야기를 썼다. 글로만 읽으면 고개를 갸우뚱 할 수 있지만, 누구나 여름 숲에서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후꾸보꼬 새소리를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합천군 가회면에 온 지도 어느새 6년차가 되었다. 동네 길을 걷다 보면 곳곳에 추억이 묻어 있다. 자주 이사를 다녀서인지 고향이라 할 곳도, 오래 정 붙인 동네도 없었던 탓에 괜히 마음이 뭉클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마을에 와서 이곳을 ‘우리 동네’라고 느끼고 정을 붙일 수 있었던 것은 만남 덕분이다. 시에 쓴 것처럼 나를 알아주는 ‘꽃, 새, 나무, 바람, 별’과 만난 일도 소중하지만 무엇보다 우리 식구를 따뜻하게 맞아준 이웃들 덕이 크다. 이 마을에 와서 ‘청년 농부’를 귀하게 여겨주시는 어른들을 만났다. 많은 농어촌 마을이 65세가 넘은 어르신들만 남아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농촌에 청년이 부족한 것은 하루 이틀 문제가 아니다. 다행인 것은 청년들이 시골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고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안타까운 것은 그런 청년들을 맞이할 준비가 된 마을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새로운 길을 찾아 농촌으로 삶터를 옮겼다가 어쩔 수 없이 다시 도시로 돌아가는 청년들이 있다. 청년이 농촌에 정착하려면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 나에게 묻는다면 ‘좋은 만남’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6년 전, 아무런 기반 없이 농촌에 왔지만 내가 자립할 수 있는 길을 함께 고민하고, 작은 힘이라도 보태 주려는 분들이 곁에 계셨다. 낯선 마을에서 밭을 빌리기 어려웠을 때, 선뜻 나서서 밭주인을 소개해 주셨다. 첫 해에는 심고, 풀을 매고, 수확하는 일까지 도와주시며 농사에 대해 알려 주셨다. 도시에서 자라서 호미 한 번 보지 못했던 내가 호미질, 괭이질, 낫질, 삽질하는 요령까지 몸에 익힐 수 있었던 것도 이웃 농부님들이 찬찬히 곁에서 가르쳐 주신 덕이다. 농촌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 인문학교, 독서토론, 글쓰기 반을 열기도 했다. 때로는 이웃들을 초대해 음악회를 열고, 스크린에 빔 프로젝트를 쏘아서 커다란 화면으로 영화를 보기도 했다. 영화관이 없는 산골 마을에서 맛있는 음식 나누어 먹으며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소박하지만 특별한 밤이 되었다.

이웃 어른들이 나누어 주신 마음으로 나는 지난 5년 동안 농부로 살 수 있었다. 하루아침에 무언가 이뤄 낼 수는 없었지만 지쳐서 나가떨어지지 않고, 한 걸음씩 걸어 갈 수 있었다. 조금 덜 힘들었고, 조금 덜 외로웠다. 무엇보다 고마운 것은 많은 힘을 보태어 주시면서도 나를 존중해 주신다는 것이다. 내가 보아도 답답한 구석이 많은 나인데, 어른들이라고 내가 조금 더 힘을 내주었으면, 조금 더 당찼으면, 이만큼만 더 해주었으면 하는 욕심이 없으셨을까? 그럼에도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으셨다. 내가 살아가고자 하는 모습과 방향을 인정해 주시고, 내 느린 걸음을 기다려 주셨다.

청년을 맞이할 준비라고 해서 대단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청년에게 ‘우리 동네’가 되어 줄 수 있는 따뜻한 품이면 충분하다. 어떤 삶을 살고 싶어서 이곳에 왔는지,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 함께 해 볼 수 있는 일은 없는지. 그렇게 곁에서 들어주는 어른이 있다는 것만으로 농촌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된다. 멀리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와 인사 나눌 수 있는 우리 동네가 있다는 게 참 좋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든든한 위로가 된다. 청년들에게 따듯한 동네가 되어 주는 어른이 많이 계시면 좋겠다. 많은 청년이 농촌에서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추억과 함께 살 수 있게 되기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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