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슬(서와)/청년농부·경남 합천

[한국농어민신문]

세상을 냉정하게 바라보면 현실은 막막하고, 치열하고, 어려운 것들로 가득하다. 때로는 그 무엇도 닿지 않을 것 같은 아득하고 캄캄한 밤이 나를 찾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평범한 낭만을 잃지 않으려고 애쓴다. 나를 나답게 해 주고, 살아 있는 존재라고 느끼게 해 주는 그 일들을 말이다. 

“생각보다 농사지으며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아. 일하는 것도 꽤 재미있고, 또 들에서 돌아오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잖아.”

“그렇지. 바쁜 농사철에는 하루 종일 들에서 일하지만 더운 여름이나 풀이 조금 더디게 자라는 9월 즈음에는 오전에만 일을 하는 날도 많으니까. 또 비 오면 쉬고, 겨울에도 쉬고.”

며칠 동안 우리 집에서 지내다간 친구와 나눈 이야기다. 농사지으며 사는 것도 괜찮겠다는 말이 퍽 반가웠다. 잠시 일손을 도우며 느끼는 것과 농부가 되어 농사를 짓는 마음은 다르겠지만 친구 말처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기에 농부는 꽤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농사를 지어 먹고사는 농민이지만 농사 말고도 하고 있는 일들이 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나무를 깎아 무언가를 만들기도 한다. 필름 카메라를 들고 마을을 다니며 사진을 찍고, 책을 읽고 독서토론도 한다. 이웃들과 힘을 모아 달마다 인문학교를 열고, 마음 맞는 친구들과 음악회도 연다. 이따금씩은 다른 지역에 초대를 받아 노래 공연을 다녀오고, 농민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러 다닌다. 돈벌이가 되는 일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일도 있다. 하지만 좋아서 하는 일이고, 내 삶을 채우는데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는 일들이다.

농사를 짓기 시작했던 스무 살 때부터 “어떻게 농사를 짓겠다는 마음을 먹었어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오랫동안 그 질문에 받으면서 여러 대답을 찾게 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제가 살아 있다고 느끼는 일을 하며 살고 싶어서요”라는 말이다. 내가 일을 정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은 그런 것이다. 나를 나답게, 자연스럽게,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면 내 일이 될 수 있다.

때로는 이런 이야기를 불편해 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산골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것을 너무 낭만으로만 표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누리며 살고 있는 삶을 일부러 숨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낭만’ 만큼이나 좋아하는 말 가운데 ‘평범하다’라는 말이 있다. ‘뛰어나게 잘난 것 없는 보통’을 뜻하는 말이다. 내 삶 이야기를 특별하게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평범한 사람이고, 별 다를 것 없이 평범하게 산다. 내가 바라는 낭만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지금 흘러가고 있는 평범한 날을 잘 누리고 싶을 뿐이다. 사람이 낭만으로만 살 수는 없지만 낭만 없이도 살 수 없다. 그게 내가 낭만에 대하여 찾은 대답이다.

세상을 냉정하게 바라보면 현실은 막막하고, 치열하고, 어려운 것들로 가득하다. 때로는 그 무엇도 닿지 않을 것 같은 아득하고 캄캄한 밤이 나를 찾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평범한 낭만을 잃지 않으려고 애쓴다. 나를 나답게 해 주고, 살아 있는 존재라고 느끼게 해 주는 그 일들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낭만은 치열하기도 하다.

처음 농사짓기 시작했을 때,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하는 것은 나에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제 그만 들어오라고 식구들이 말려주어야 했다. 그만큼 좋아서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몸이 지치면 마음도 지치는 법이었다. 밭에서 온 힘을 쏟고 집에 돌아오면 가만히 누워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하루에 두세 편씩 쓰던 일기도, 틈만 나면 그리던 그림도 그리지 않은지 오래였다. ‘기타 치며 노래 부르기도 좋아했는데, 그러고 보니 책을 읽은 지는 얼마나 됐지? 친구는 언제 만났고?’ 내가 좋아서 선택한 농사이지만 내가 바라는 삶과는 조금씩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동생과 함께 만들어 부르는 ‘낭만 농부’라는 노래 가운데 “낭만이 별건가요. 멈춰 서면 보이는 걸요”라는 노랫말이 있다. 아무리 좋아서 하는 일도 멈추어야 하는 때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잘 멈춰서는 연습을 하고 있다.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처음에는 비가 오지 않는 날, 밭에 나가 일하지 않으면 안절부절못했다.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다 보면 자꾸 ‘이렇게 놀아도 괜찮은 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하는 것과 노는 것이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싶으면서도,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는 것도 내 삶을 채우는 중요한 일이란 걸 알면서도 그렇게 살 수 있기까지 오랜 연습이 필요했다. 아직 연습해 가는 과정이다. 나는 그렇게 내가 바라는 삶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애쓰고 있다.
 
나는 쓸모 있는 사람보다
오늘 본 밤하늘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지난 해 봄에 썼던 ‘오늘부터’라는 시다. 처음에는 꽤 긴 시였는데 고치고 다듬다 보니 딱 세 줄이 남았다. 나는 쓸모 있는 사람보다 내 삶을 쓸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오늘 본 밤하늘을 함께 쓸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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