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슬(서와)/청년농부·경남 합천

한국농어민신문]


또 한 가지 상상을 해본다. 농부가 ‘월급’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게 말이 돼?’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상상하고, 자꾸만 소리 내어 말해야 언젠가 현실이 되지 않을까?


이제 고추가 끝물이라 따서 말리면 까맣게 변해 버리는 고추가 많다. 그래도 이상한 날씨를 견디며 온 힘을 다해 익은 고추를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고랑에 쪼그리고 앉아 고추를 따는데 모기가 달려들어 팔과 다리를 마구 물었다. 모기에게 “이제 여름도 갔는데 너희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구나”라고 말했다.

산에 사는 모기라 그런가? 어찌나 간지럽던지 집에 돌아와 얼른 씻으려는데, 바지에서 핸드폰이 팍! 하고 떨어졌다. ‘설마, 설마’하면서 슬며시 들어보았더니 액정이 아주 깨져 버렸다. ‘어휴, 또 돈 들어갈 일이 생겼구나’하는 마음이 가장 먼저 들었다. 잘 쓰고 다니던 안경이 부러져서 이미 계획에 없던 돈을 썼는데 말이다.

이렇게 생각지 못한 돈을 써야 할 때면 밭에 있는 작물들이 머릿속을 휘리릭 지나간다. 생강은 폭염에 싹이 제대로 올라오지 못했다. 그나마 살아 있는 생강도 비실댄다. 죽은 생강 자리에 무를 심지 않았으면 밭이 텅텅 비었을 것이다. 그리고 콩밭에는 고라니가 자꾸만 내려온다. 울타리를 쳐 놓아도 어디로 들어오는지, 콩밭을 마구 밞으며 콩잎을 따 먹는 고라니를 막을 길이 없다.

이상 기후 때문인지 이번 해에는 작물이 자라지 못한다. 텃밭에 심은 가지, 호박, 당근, 오이, 옥수수도 제대로 따 먹지 못했다. 한창 텃밭 작물을 따다가 밥 해 먹는 재미가 쏠쏠할 때인데, 요즘은 장을 보지 않으면 끼니를 해 먹을 재료가 없다. 장을 볼 때마다 ‘농부가 9월에 장을 보다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그나마 덤덤하게 자라고 있는 고구마를 보면서 위로를 받는다.

봄에 씨앗을 뿌리고, 여름 내내 풀을 매면서 밭을 돌보지만 농부는 월급을 받듯이 꼬박꼬박 수입이 생기지 않는다. 6월에 감자와 양파를 팔고 나면, 10월은 되어야 고구마를 캐기 시작한다. 이제 가을걷이를 앞두고 있는데 작물들이 시들시들 하니 밭에 가는 발걸음이 자꾸만 무거워진다.

지난 겨울에 짧은 여행을 다녀왔고, 봄에는 종자를 사느라 목돈이 나갔다. 여름에는 나처럼 시골에서 삶을 꾸려가는 청년들을 만나러 다른 지역을 다니고, 배우고 싶은 강의를 들으러 다니느라 참가비와 교통비가 꽤 들었다. 돈을 쓸 곳이 자꾸 생기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작물을 보면서 숫자 계산을 하게 될 때가 있다. 농사 수입을 계산 하는 일도 필요하지만 그래도 작물 앞에서 만큼은 돈 생각을 하고 싶지 않다. 온전한 생명으로 대하고 싶다.

며칠 전 그런 내 마음을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잘 자라지 못하는 작물들을 보면서 생명이 죽어간다는 안타까움을 가지기보다 숫자 계산을 먼저 하고 있는 내가 부끄러워요. 생명을 가꾸는 농부라면서…….” 숨기고만 싶었던 마음을 털어놓으니 눈가가 시큰시큰 했다. 엄마는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들으시고 “그건 당연한 거야”라고 하셨다.

“돈에 대한 고민도 필요해. 네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돈을 벌려고 하는 거잖아. 그런 고민조차 하지 않으면 이상주의자가 되어 버릴지 몰라. 네가 밭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면 생명을 대하는 정성이 느껴져. 농부로 살아가는 너에게 자연스럽게 흐르는 마음이 보여.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야. 그건 생명을 돈으로 바라보는 것과는 다른 마음이니까.”

엄마가 해 준 말 덕분에 마음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불편한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건 나 혼자 하는 고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소농들은 농작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면 생계와 바로 연결이 된다. 농사가 잘 되어도 농작물 값이 터무니없을 때가 많은데, 농사가 안 된 해에는 고민이 더 깊어진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부터 순수익 계산을 하지 않는다. 계산하면 속상할 일만 생기니까. 자연에서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느끼고, 밭을 가꾸면서 행복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값을 받은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이상주의자로 남지 않으려면 그 다음 고민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살아가려면 ‘돈’이라는 도구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바로 해 볼 수 있는 것은 밭에 가지 않는 시간에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만드는 것이다. 밭일로 몸이 피곤할 테니 내가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이여야 한다. 나는 무언가를 디자인하고, 만들 때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농사만큼이나 좋아하는 일이다. 웹 포스터 만들기, 그림엽서 만들기, 모자와 가방, 작은 소품 만들기로 틈틈이 돈을 벌 수 있겠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해 볼만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 한 가지 상상을 해본다. 농부가 ‘월급’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게 말이 돼?’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상상하고, 자꾸만 소리 내어 말해야 언젠가 현실이 되지 않을까? 소농으로 땅을 살리는 농부들에게 작더라도 꾸준하게 들어오는 수입은 큰 힘이 된다. 적어도 ‘돈’이라는 벽에 부딪혀서 땅과 종자를 살리는 농사를 그만 두지는 않을 것이다. 작물을 온전한 생명으로 바라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돈보다 더 소중한 것들을 잃지 않으려는 간절함이 필요하다. 혼자 꾸면 꿈일 뿐이지만 여럿이 꾸면 현실이 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언젠가 철없는 청년 농부가 꾸는 이 꿈이 현실이 될 날이 올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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