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희 청년농부·전북 순창

[한국농어민신문]

폐를 끼치지 않는 농사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내게 오는 수확물 어느 것 하나 거저 오는 것이 없고 다른 누군가의 도움과 희생을 딛고서야 비로소 나에게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과정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참여하는 손길들에 감사하고, 덜 폐를 끼치고 도움이 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앞으로의 나의 과제가 아닐까.

봄이 오고 봄과 함께 밭도 찾아왔다. 작년에 청년 창업농을 준비할 때는 그렇게 구하기 어렵던 밭이 올해는 구하지도 않았는데 나에게로 왔다. 작년에 빌린 밭 바로 아랫밭이라 작업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밭이다. 아는 언니의 땅인데 농사를 안 짓는다고 먼저 연락이 와서 농지은행을 통해 정식으로 5년 임대를 받았다. 비록 전에 빌려짓던 분이 수확 후 비닐을 하나도 안 걷고 가서 굳은 땅을 기어 다니며 한참을 씨름해야 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풀 속에 감춰진 비닐을 벗기면서 자던 뱀도 깨우고 개구리도 놀래키면서 즐겁게 작업을 했다.

그렇게 비닐을 벗기고서는 밭을 갈아야 하는데 기계가 없는 나는 밭 갈기가 쉽지 않았다. 신청하면 저렴한 가격에 밭을 갈아주고 두둑을 만들어주고 비닐까지 씌어주는 순창군농기계작업단이 있지만 고추 심는 철이라 근시일에는 예약이 가득 차 있었다. 또 짓는 평수가 많다보니 평당 부과되는 농작업비도 은근 부담이 됐다.

근처에 내가 아는 언니는 직접 경운기로 밭을 갈고 두둑도 만들며 혼자 토종농사를 짓는다는데 이 기회에 나도 경운기를 좀 몰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사를 배우는 선생님께 경운기를 빌려 달라 요청 드렸다. 우선 기계가 들어가기 힘든 200평 밭만 경운기로 갈고 두둑도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선생님이 두둑 만들 때 옆에서 몰아봤는데 힘이 많이 들긴 해도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선생님 생각은 나와 다르셨나보다. 자신만만한 내 계획을 듣고 한숨을 푹 쉬더니 트랙터를 가진 다른 농민회 형님에게 전화를 해 기계로 밭 좀 갈아달라는 특명을 내리셨다.

다음날 일하면서 정신없는 중에 잠깐 밭을 보여드리고 작업날짜를 잡을 계획이었는데, 때마침 시간이 맞았던 농민회 형님 다섯이 우르르 내 밭에 방문했다. 정작 주인은 일한다고 없는 사이에 밭을 갈고 두둑을 만들고 관리기로 비닐까지 다 쳐주셨다. 나는 새참만 날랐다. 다른 넓은 밭들도 결국 어쩌지 못하는 사이에 형님들의 대형 트랙터로 다 갈게 됐다. 너무 감사했지만 한편으로는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벌써 순창에 온지 5년차인데도 밭가는 것부터 내 스스로 하지 못한다는 게 부끄러웠다. 내가 생각했을 때 5년차쯤 된 나는 좀 더 농사도 수월하게 짓고 이것저것 할 줄 아는 게 많을 것 같았는데 여전히 주변에 민폐만 끼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관계 속에서 계속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은 감사했지만, 계속 이렇게 손을 벌리는 것을 당연시 여겨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올해는 뜻을 같이하는 언니들과 농업기술센터에서 농기계교육을 듣기로 했다. 경운기와 소형 트랙터 교육인데 받고나서는 농기계임대센터에서 해당 장비를 직접 빌려 사용할 수도 있다고 한다. 배워놓으면 비싼 돈을 내고 밭을 갈거나, 다른 사람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도 직접 밭을 갈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다른 막막한 청년의 밭을 갈아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섣부른 기대도 생겼다.

농사는 어떤 부분에서는 함께할 수밖에 없지만,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혼자 오롯이 책임져야하는 것 같다. 농사초보인 나는 함께해야하는 부분에서는 어떻게든 혼자 해보겠다고 끙끙거리다가 병이 나고, 혼자 해야 하는 부분은 또 감당하지 못해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며 민폐를 끼치기도 한다. 아마 앞으로 농사경력이 는다 해도 다시금 누군가의 손이 간절히 필요해질 것이고, 언제는 또 내가 그렇게 도움을 주고 할 것이다. 그래도 앞으로는 폐 끼치는 것보다는 좀 더 주변에 도움을 주는 빈도가 더 늘어났으면 좋겠다.

생각해보니 사실상 농사를 짓는다고 사람 뿐 아니라 원래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식물에게도 정말 많은 폐를 끼쳤다. 당장 비닐을 걷으면서부터 뱀과 개구리는 혼비백산 자리를 피했고, 고라니와 멧돼지는 이제 둘러쳐진 망에 막혀 지나가던 길을 이용할 수 없다. 무럭무럭 자란 밭가에 풀들은 예초기로 댕강댕강 잘려나갈 운명이고 트랙터가 밭을 가는 동안 땅속에 살던 수많은 생명들은 고통을 받을 것이다.

폐를 끼치지 않는 농사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내게 오는 수확물 어느 것 하나 거저 오는 것이 없고 다른 누군가의 도움과 희생을 딛고서야 비로소 나에게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과정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참여하는 손길들에 감사하고, 덜 폐를 끼치고 도움이 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앞으로의 나의 과제가 아닐까.

정신없는 5월, 밭이 갈리고, 두둑이 생기고, 비닐이 씌워지고, 그 위로 작물이 심겨지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감사와 죄송한 마음이 교차한다. 분명 안 될 걸 알면서도 이제는 더 이상 어디에도 폐 끼치지 말고 남은 농사 잘 지어보자고 마음을 다잡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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