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희 청년농부·전북 순창

[한국농어민신문]

내 결혼 계획보다는 내가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봐줬으면 좋겠고, 내가 미혼 남성과 이야기를 나눌 때 그것이 맞선이나 결혼을 전제하지 않으며, 그저 편하게 교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해줬으면 한다. 결국에는 그냥 나라는 사람을 봐줬으면 하는 것이다.


“남편은 있어? 그럼 큰애기네.”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 맞닥뜨리는 나의 새로운 호칭이다. 어디까지 통용되는 단어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있는 곳에서는 결혼 안 한 성인 여성을 가리켜 ‘큰애기’라는 표현을 쓴다. 분명 다 크긴 컸는데 결혼을 안 했으니 아직 어른이 아닌 애기란 뜻이다. 처음에는 기분이 살짝 나빴는데 들을수록 정감이 간다. 다짜고짜 처녀나 미쓰, 아가씨 등의 호칭이 나오는 것보다는 덜 무례하게 들리고 귀엽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는 결혼 여부를 물어보면 먼저 “큰애기에요”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대부분은 의아해하고 또 안타깝게 여기기도 하고, 탐탁찮은 시선을 주기도 한다. 재미있었던 반응 중 하나는 부러워하는 할머니를 만났을 때다. 할머니는 자기 시대 때는 무조건 결혼은 해야 하는 거였다면서, 자기도 지금 같은 시대를 만났으면 결혼 안 했을 거라고 탄식했다. 그 솔직한 반응이 재미있어 할머니랑 오래오래 수다를 떨었던 기억이 난다.

농촌에서는 대부분 결혼 안 한 사람에게 ‘그래도 결혼은 해야 한다’는 반응을 보인다. 소개시켜주겠다는 경우도 있고, 또 이유를 물어보며 진지하게 설득하려고 들기도 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농촌에서 여성 혼자 살아가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도시에서는 비혼이 그렇게 튀는 일도 아닌데, 젊은 사람 자체가 적은 농촌에서는 유독 걱정거리로 부각되는 것 같다.

순창귀농센터에서 교육팀장으로 일하는 동안 많은 비혼 여성들이 순창에 내려왔다. 같은 젊은 여성이기 때문에 교육 이후에 집을 구하는 동안 센터 관사를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큰 메리트였던 것 같다. 내가 있는 동안 센터 관사는 비혼 여성들의 아지트이자 결혼한 언니들의 일탈 공간이기도 했다.

팀장이 되고 1년 반쯤 지나서는 센터 근처에 아예 청년들이 지낼 수 있는 공간을 임차하기도 했다. 나를 제외한 3명의 청년들이 함께 생활하며 하우스 농사를 배웠다. 이후에는 청년로망시험포라는 이름으로 5명이 함께 농사를 지었는데 4명이 여성이었다. 함께 농사를 짓고 배우면서 적당히 느슨하면서도 안전한 관계 속에서 나는 만족을 느꼈다.

결혼 안 한 젊은 여성이 흔하지 않은 농촌이지만, 내 관계망 속에서 비혼 여성은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지금도 나는 결혼 안 한 친구 둘과 함께 살고 있고, 결혼을 안 했다고 해서 크게 불편하거나 외롭거나 고립되는 일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망 없이 홀로 농촌에 내려와 바로 마을에서 생활했다면 과연 나는 잘 지낼 수 있었을까. 분명 처음 내려올 땐 씩씩하게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 살아볼수록 자신이 없다. 집을 구할 때도, 농사를 배울 때도 결혼을 안 한 여성은 언제든 ‘결혼을 하면 남편을 따라서 이곳을 떠날 사람’으로 인식된다. 이 인식은 잘 깨지지 않는다. 또 청년회와 부녀회로 확고하게 나눠져 있는 농촌마을에서 큰애기는 어느 모임에도 편입되기 힘든 골칫덩이다..

마을에서 여성 혼자서는 농사를 배우는 일도, 집을 구하는 일도 무엇 하나 가능한 일이 없다. 혹여나 집을 구하더라도,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고립된 채 담을 쌓게 되면서, 주변으로부터 ‘그러니 이렇게 살지 말고 결혼을 해야지’라는 조언을 받게 될 가능성이 높다. 안전에 대한 문제도 크다. 밤늦게 술 취한 마을사람이 찾아온다거나, 차마 지면에는 담을 수 없는 사연을 겪기도 한다.

모멸적인 말을 하면서도 이를 덕담으로 치부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농촌에 왔으니 좋은 총각을 만나서 빨리 결혼해야 애를 많이 낳을 수 있다고 몇 번이고 강조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한 언니는 ‘소나 돼지 같은 가축으로 취급받는 느낌’이었다고 전했다. 이런 무례한 말들이 정말 문제인 이유는 이런 말을 하는 당사자들이 왜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런 말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상식이 지배하고 있는 공간인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내 결혼 여부보다는 나라는 사람을 더 궁금하게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나는 앞으로 결혼을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내가 계획한 삶 속에서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내 결혼 계획보다는 내가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봐줬으면 좋겠고, 내가 미혼 남성과 이야기를 나눌 때 그것이 맞선이나 결혼을 전제하지 않으며, 그저 편하게 교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해줬으면 한다. 결국에는 그냥 나라는 사람을 봐줬으면 하는 것이다.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니,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친구 몇 명과 마을에서 이해해주는 어른 한둘만 있어도 큰애기는 잘 정착할 수 있다. 결혼 안 한 여성이라는 프레임이 아닌 농촌이 좋아 찾아온 독립적인 주체로서 인식하고 대해줄 수 있는 사려 깊은 사람 한 명이 지원정책 100개보다 더 효과적이다. 그런 가뭄에 단비 같은 사람이 점차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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