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초록이는 장정 열사람 분의 일을 거뜬히 했다. 초록이가 있어서 나의 농촌 생활이 더욱 다채로울 수 있었다. 농사를 짓는 일도 집에 세간을 들이는 일도 엄두가 안 난다고 머뭇거리는 일 없이 이것저것 많이 도전해볼 수 있었다.

ㅣ김현희 청년농부·전북 순창

운전을 하다보면 ‘빵’하는 짧은 경적소리를 듣는다. 처음에는 ‘내 차에 무슨 문제가 있나, 내 운전이 이상한가’하고 긴장했지만 시골에서 아는 차를 만나 반가움에 하는 인사임을 깨달은 지금은 자연스럽게 상대를 확인하고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휘젓곤 한다. 최근 3년간은 이 경적 소리를 참 많이 들었다. 나의 행적도 모두 노출된다. ‘너 어제 중앙로에서 뭐했냐?’, ‘동계에는 무슨 일로 온거냐?’ 등의 연락도 참 익숙하다. 모두 나의 초록이 덕분에 겪게 되는 일이다.

초록이는 순창에 내려와 만난 세 번째 차다. 첫 번째 차는 수동 소형차로 다른 귀농인에게 50만원에 구입해 2년간 잘 타다가 보내드렸다. 두 번째 차는 아반떼인데 아는 분께 받아서 일주일정도 타던 중 그 분이 트럭을 다시 연결해주시면서 다른 청년에게 넘겼다. 세 번째 차가 나와 3년을 넘게 동고동락한 초록이로 이름처럼 온통 초록으로 도색된 포터차량이다. 연식은 무려 1999년. 앞자리가 1로 나와 같은 연배이지만 초록으로 도색된 만큼 사연도 다양했는지 주행거리는 10만km밖에 타지 않은 트럭이었다. 

초록이를 처음 만났을 때가 청년협업농장을 막 시작했던 시기라 트럭은 정말 요긴하게 잘 쓰였다. 퇴비도 옮기고 모종도 옮기고, 비계를 세워서 하우스 파이프도 옮기고, 농기계도 빌리고 수확한 농산물도 실어 날랐다. 광주나 전주에서 쓸 만한 가구나 가전들이 중고장터에 올라오면 사와서 집에 두고 남은 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이사 오거나 가는 청년들의 이삿짐도 초록이가 옮겨주었다. 대밭에 가서 죽공예에 사용할 대나무를 실어 나르는 일도 초록이의 신세를 졌다. 

초록이의 예쁘고 깨끗했던 외관은 금세 험악하게 변했다. 청년협업농장을 할 당시 내가 사는 집은 마을 골목 안쪽이었는데 가는 길이 매우 좁고 경사가 가팔랐다. 그래서 벽이나 담에 긁히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내리막길을 내려갈 땐 잘못된 각도로 진입해 움직이지 못한채로 바퀴가 헛도는 일도 많이 일어났다. 그럴 때 마다 청년들이나 이웃을 트럭 짐칸에 태워 무게를 나가게 한 뒤 빠져나가곤 했다.

초록이는 보험을 일부로 누구나 운전 가능한 옵션으로 들었다. 그래서 트럭이 급하게 필요한 사람들이 알뜰살뜰 잘 가져다가 썼다. 친한 분이 빌려가서 쓰다가 사이드를 제대로 걸지 않아 밀려 내려가다 트랙터에 박아 앞 범퍼가 깨지는 사고가 나기도 했다. 순창에서만 쭉 탈거라 굳이 돈 들여 안 고치고 그냥 타고 다녔다. 열쇠도 챙기는 게 귀찮아 항상 꽂아 둔 상태로 다녔는데, 한번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 몰고 나가는 사건도 있었다. 그 이후 한 달 정도는 조심해서 열쇠를 챙겼는데, 그 이후부터는 다시 흐지부지 원래대로 돌아갔다. 

앞으로 2~3년은 더 탈수 있을 줄 알았는데, 변수가 있었다. 노후 경유차에 대한 운행 제한조치가 강화되면서 점점 순창 안에서도 타는 게 쉽지 않아졌다. 미세먼지가 심한 날은 순창에서도 카메라를 통한 단속을 한다고 했다. 잔고장도 많아지기 시작 했지만 본격적으로 교환하거나 고치기에는 차의 상태가 너무 애매해 그냥 달래가면서 탔다. 올 초에 신청 받았던 노후경유차 조기폐차 지원사업은 신청하지 않았지만, 이후에 추가 모집을 하게 된다면 연락을 달라고 행정에 요청해두었는데, 며칠전 추가배정이 가능하다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신청서를 내고 이제는 조기폐차를 기다리고 있다.

초록이는 장정 열사람 분의 일을 거뜬히 했다. 초록이가 있어서 나의 농촌 생활이 더욱 다채로울 수 있었다. 농사를 짓는 일도 집에 세간을 들이는 일도 엄두가 안 난다고 머뭇거리는 일 없이 이것저것 많이 도전해볼 수 있었다. 초보 운전자가 험하게 몰았음에도 큰 탈 없이 건강하게 달려준 초록이가 너무나 고맙다. 그래서 완전히 폐차하며 보내기 전에 초록이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추억을 곱씹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초록이의 덕을 봤던 사람들과 전망 좋은 곳에 가서 짐칸에 올라앉아 소박하게 감사공연을 해줄 생각이다.

당장 초록이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막막하다. 예초기를 실고 밭에 가는 일에서부터 농장에 부업하러 갈 때, 영농조합에서 일할 때도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매우 튀는 외관 덕분에 주변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았는데, 이제는 지나가는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면 많이 아쉽다. 지금 열심히 발품을 팔아가며 다음 차를 구하고 있는데, 앞으로 만나게 될 차와도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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