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희 청년농부·전북 순창

[한국농어민신문] 

다양한 인프라가 갖춰져 있는 서울에서 살 때 나는 소비자로 존재했다. 모임이든 교육이든 서비스나 물건들까지 조금만 발품을 팔면 내 취향에 맞는 전문적인 손길이 들어간 것들을 만날 수 있었다. 신비한 규모의 경제 속에서는 적은 재화로도 상향평준화된 서비스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순창에 내려와 나는 점차 생산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농업을 통해 1차 생산물을 만들어 내는 것 이상으로 놀이, 여가, 운동, 교육, 모임 등 다양한 삶의 부분들을 자급자족을 통해 채워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에는 이 지점이 참 불편하게 다가왔다.

도시에서 일할 때는 야근하고 나서도 늦게 운동을 할 수 있는 체육관이 다양하게 있었고, 그 중 나와 잘 맞는 곳을 골라서 이용할 수 있었지만, 순창에서는 선택지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원하는 운동을 배우기 위해 광주까지 나가는 언니도 있었다. 듣고 싶은 강연, 보고 싶은 공연, 체험이나 쇼핑, 외식까지도 좋은 것들은 모두 도시에만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나는 생산자로서 나에게 필요한 서비스와 문화를 직접 만들어가는 삶이 만족스럽다. 도시만큼 편리하고 전문적이지는 않겠지만, 주체적이며 창조적인 생활방식이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소비하고 끝났을 일을 한정된 예산과 에너지를 활용해 직접 만들어내는 것은 번거로울지 몰라도 그만큼 보람찬 일이다.

일례로 맥주를 좋아하는 언니들은 순창에서 생맥주를 먹을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많이 아쉬워했다. 한통을 따고나면 빨리 소진해야하는 생맥주의 특성상 생맥기계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쌀농사를 짓는 언니는 여러 사람이 함께 빌린 공유공간에 매달 하루를 ‘생맥데이’로 지정해 주점을 여는데 이날 다양한 사람들이 생맥주를 마시러 온다.

여기에 더해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장을 담그듯 직접 술을 담가 마신다. 직접 기른 쌀로 만든 가양주부터 수제맥주까지 주종도 다양하다. 술을 좋아해서 만들다가 창업을 한 사람도 있다. 읍내에서 늦게까지 술을 마시기 쉽지 않으니 직접 만들어 집으로 사람들을 초대해 마시게 되다보니 일어난 일이다. 정기적으로 술 만들기 모임도 활발하게 일어난다. 다양한 문화강좌를 직접 섭외하기도 한다. 함께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몇 명만 모여도 금세 일이 진행된다. 듣고 싶은 강연이나, 해보고 싶은 체험, 운동도 직접 발품을 팔아 진행한다. 이런 일은 도시에서는 전문적인 기획자나 기업이 나서 하는 일이겠으나, 이곳에서는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

한정된 에너지와 시간, 예산의 문제로 못하고 있지만 해보고 싶은 일들은 참 많다. 요즘 나의 관심사는 읍에서 축제나 강연 모임 등을 할 때 면단위의 사람들, 특히 청소년들이 어떻게 늦게까지 참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최근 도우미로 참여했던 청소년 축제에 면단위 청소년들이 막차버스를 타기위해 일찍 갈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생긴 고민이다. 셔틀을 운영한다거나 택시비의 일부를 지원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내가 있는 곳의 결핍을 발견하고 이를 농촌지역에 적합한 방식으로 해소해 나갈 방안을 찾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로컬 크리에이터’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지역이라는 뜻의 ‘로컬’과 창작자라는 뜻의 ‘크리에이터’를 합친 로컬 크리에이터는 보통 지역 특색을 살린 컨텐츠를 가지고 지역에서 창업을 하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꼭 업이 되지 않더라도 내가 있는 곳의 결핍을 찾아 적재적소에 맞는 일을 만들어 내고 공동체와 문화를 만드는데 이바지 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야말로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자격이 있지 않을까.

도시에서는 단순히 편하게 소비하고 끝났을 일들을 이뤄내기 위해 공동체가 움직이고 하나의 문화가 돼가는 과정을 경험하면서 나는 농촌에서의 삶이 도시보다 훨씬 더 다채롭고 풍성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됐다. 이런 불편함을 기꺼이 여길 새로운 로컬 크리에이터들이 순창에도 더욱 많아지면 좋겠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한국농어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