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희 청년농부·전북순창

[한국농어민신문]


농촌에 살아보니 전업농도 필요하지만, 적게나마 농사를 지으면서도 당장 손 필요한 곳에 여기저기 투입될 수 있는 홍반장 역할을 하는 소농들의 존재가 참 중요하다고 느꼈다. 인구가 부족한 농촌은 잠시 잠깐씩 다른 사람의 손을 필요로 하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고구마 수확이 끝나고, 들깨까지 털고 난 후 겨울 동안 돈 나올 곳이 궁해진 나는 지역에서 친환경농산물을 유통하고 있는 영농조합 일을 시작했다. 당장 전업농만으로 생존하기는 어렵겠다고 스스로 판단한 것이다. 결국 야심차게 시작했던 전업농의 꿈은 취업과 함께 잠시 유보되었고, 내년 농사는 지역의 청년들과 동업하기로 의기투합했다.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농촌생활이 계획처럼 되지만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만큼 크게 낙심이 되지는 않았다. 새롭게 경험하는 농촌 현장의 유통을 겪으며 배우고 느끼는 바가 많다.

굳이 ‘반농반X’(절반은 농사를 짓고 절반은 자기에게 맞는 다른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농촌살이 방식)이라는 유행하는 어려운 말을 쓰지 않아도, 지역에 자리잡아가는 귀농인들이나 생산 규모가 크지 않은 소농들은 필수적으로 겸업을 한다. 주말에 체험농장에 일손을 도우러 가면 인솔자로 온 다른 청년농부를 만나고, 서로 ‘이게 제 4번째 직업입니다’라고 소개하며 너스레를 떨 정도로, 몇 개씩의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농촌에서 자기 농사로만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규모가 된다는 이야기니 부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365일 자기 농사에만 매여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니 무겁고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2004년 개봉한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에서 홍반장은 동네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도맡아서 하고 다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홍반장은 자장면 배달부터 편의점 아르바이트, 분식집, 라이브 카페 등의 일을 하고 있어 동네 어디를 가도 볼 수 있고, 다양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새로 동네에 들어온 사람에게는 한없이 오지랖을 부린다. 이 홍반장의 캐릭터가 참 매력적이라고 느꼈던 이유는 전문화 분업화되어 삭막해진 오늘날 그의 존재가 마을의 필요한 부분들을 채워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홍반장이 돈을 벌기 위해 하고 있는 일들은 우리 사회에서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일들이다. 전문성이 요구되지 않고, 언제든지 다른 사람으로 대체 가능한 일. 그러나 언제나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이고 이들이 있어야 공동체는 유지된다.

농촌에 살아보니 전업농도 필요하지만, 적게나마 농사를 지으면서도 당장 손 필요한 곳에 여기저기 투입될 수 있는 홍반장 역할을 하는 소농들의 존재가 참 중요하다고 느꼈다. 인구가 부족한 농촌은 잠시 잠깐씩 다른 사람의 손을 필요로 하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사업적 개념으로 자기 농업에만 매진하면 다른 일까지 신경 쓸 에너지가 없는데, 농촌은 소소하게 사람이 필요한 곳이 너무 많다. 돌봄과 가꿈의 개념으로 농사를 지으며 농촌 상황에 맞춰 적재적소에 투입되는 사람들도 농촌에서는 꼭 필요한 사람들이다.

비록 이들의 존재 가치는 항상 저평가되고, 생존의 어려움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지만, 개개인의 삶은 다채로움이 넘쳐난다. 내가 있는 창림동 문화마을에서 요일부엌을 하고 있는 언니들만 봐도 그렇다. 일주일의 하루씩 본인들이 농사지은 농산물을 가지고 밥상을 차린다. 어느 날은 잘 차린 집밥 같고, 어느 날은 도시에서도 못 먹어본 이색적인 외국 요리들이 올라와 제대로 외식을 한 기분이 든다. 일주일에 하루씩이니 각자의 매출이 크지는 않고 에너지도 많이 들겠지만, 먹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런 특색 있는 마을 식당의 존재가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그 외에도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가공을 위한 협동조합을 만들거나, 면사무소나 기술센터에 단기로 일을 하거나, 집수리 일을 하거나, 단기요양보호사로 일을 하는 등 농사를 지으면서도 지역에서 요구하는 다양한 역할들을 수행해가고 있는 사람들을 나는 많이 알고 있다. 나와 함께 생존을 도모하고 있는 몇몇 청년들도 파트타임이나 날일을 하면서 일손이 필요한 여기저기로 바쁘게 불려 다닌다. 이들이 없으면 농촌은 어떻게 될까. 농사의 규모는 크지 않더라도 꼭 필요한 존재들이다.

행정에서는 ‘귀농’과 ‘귀촌’을 구분 짓고, 청년사업 역시 농업기술센터에서 진행하는 청년사업과 군청 인구정책계 등에서 진행되는 청년사업이 나눠진다. 가뜩이나 사람이 적은 곳인데 전업농이냐 아니냐에 따라 이리 나뉘고 저리 나뉘고, 여기 불려 다니고 저기에 동원되는 식이다. 여기에 전업이 되지 못한 소농들은 어떨 때는 자격이 안 된다고 배척되기도 하고, 사람이 아쉬울 때는 동원되기도 하는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된다.

나부터도 과거 귀농센터에서 일할 때 누가 귀농했느냐고 물으면, ‘아직 농사로 전업을 삼지 못했으니 귀촌’이라고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설명했는데, 사실 이런 기준에 매이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다. ‘직장인’ 아니면 ‘전업농’으로 이분화된 구조를 벗어나 소농으로 살며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는 ‘농촌 홍반장’이라는 제 3의 길도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이러한 소농들이 가져오는 지역 내 활력이 적지 않으니, 한 가지 더 바라본다면 앞으로 지역에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일자리 사업에서는 전업이 아닌 하루에 4~5시간 정도씩만 일할 수 있는 소농들을 위한 일자리가 좀 많이 생기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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