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희 Food & Justice 지니스테이블 대표

[한국농어민신문]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 각 분야의 시스템을 어떻게 작동시킬 것인지 국가의 전략이 세워지고 이를 위한 체계적 노력이 정부의 책임 아래 실행되어야 한다. 수해 복구와 농민 위로를 넘어 기후위기 시대 국가적 차원의 농업전략이 절실하다.

오십여 일 동안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는 날이 길어지기 시작하면서 아이들 방 천장에선 빗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세찬 비가 쏟아지면 똑똑 아이들 방에 물 떨어지는 소리가 빠르게 들려 이건 메트로놈 소리라고 생각을 하자 하다가도 저러다 우리 천장이 무너질까 하는 걱정 한 자락이 마음속에 내내 자리를 잡곤 했다.

그래도 이건 다른 분들이 겪은 피해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다. 자급자족해 볼 요량으로 텃밭에 조금씩 심었던 오이, 호박과 방울토마토와 참외는 무수히 꽃을 피워 올렸지만 긴 비에 녹아 열매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논밭과 하우스가 물에 잠기고, 농산물이 다 썩어버린, 농민들이 겪은 피해에 비하면 입도 뻥긋 못할 일이다. 고추 농사도 수박 농사와 사과 농사도, 어느 농사도 안녕하지 못한 시절이 되었다.

2011년 농사를 짓던 시절, 감자를 캘 시기에 비가 오래도록 내려 감자의 절반이 땅속에서 벌레에 파 먹히고, 썩기 시작했다. 그해에는 친구들이 내려와 감자를 함께 캐 주었는데 캐도 캐도 썩은 감자가 나와 감자 농사를 제대로 짓지도 못해놓고 괜히 친구들 힘만 쓰게 했구나 미안하고 또 민망하기만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속상한 마음이 진정되고 차근차근 주변을 돌아보니 감자 농사를 지은 대부분의 농민이 “땅속에서 죄다 감자가 썩었어” 하고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해 여름은 태풍 무이파로 피해도 컸지만 비도 오래 내렸고, 또 비가 내리지 않으면 폭염이 심한 날들이 이어졌다. 그래서 몇몇 사람이 모여 농사 이야기라도 나누게 되면 이제 우리나라도 봄·여름·가을·겨울이 아니라 건기와 우기로 구분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들을 주고받곤 했다. 그해 감자를 심고 거두면서 기후변화가 농사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실감했었다.

지난 2009년 12월 7일부터 18일까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유엔기후변화협약 제15차 당사국 총회(UNFCCC COP15)가 열렸다. 국제적 환경단체인 그린피스는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 맞춰 광고를 선보였다.

15차 당사국 총회로부터 11년 후인 2020년,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과 독일 메르켈 총리가 “2009년 코펜하겐 회의에서 기후변화를 막을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했다”며 미안해하는 내용의 광고였다. 총회 내내 전 세계에서 모인 NGO들은 “기후를 변화시키지 말고 기후변화를 불러오는 시스템을 변화시켜라(System Change not Climate Change)”라고 외쳤다.

세월은 흘렀고 2020년이 되었다. 지난 2009년 세계 정치인들이 기후변화를 막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게 될 것이라던 그린피스의 광고처럼 2020년, 기후변화는 기후위기가 되었고, 기후변화를 막는 시스템은 변하지 못했다.

지구온난화, 기후변화, 지금껏 이상 기후 현상과 관련해 우리가 써왔던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달라졌다는 현상 외에 문제점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어 사람들은 기후위기 시대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기후위기 시대, 농민은 직격탄을 맞고 있다. 논밭이 물에 잠기고 과수, 축산 피해가 생기고, 병충해가 심각해지는 피해 말고도, 내년에도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막대한 비용을 감수하고라도 온도·습도를 조절해주는 시설농업이 아니면 농사가 가능할까 하는 생각도 기후위기 시대의 현실적인 고민이 되고 있다.

“기후변화가 아니라 시스템을 변화시켜라” 농업과 먹을거리를 대하는 사회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일은 기후위기를 막는 일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대안으로 많은 연구자와 시민들은 유기농을 먹자, 제철음식을 먹자, 로컬푸드를 먹자, 가족농과 소농을 보호하자, 생물다양성을 보전하자고 말해왔다.

완주 로컬푸드를 시작으로 수많은 지역에서 로컬푸드 활동이 시작되었고, 생물다양성을 보존하기 위해 씨앗을 심는 농부들, 토종종자를 이어가기 위한 활동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다양한 품종을 심는 농부와 다양한 품종을 소개하는 농산물 유통사업자도 활동하고 있고, 보존해야 할 작물과 음식을 기록하고 알리고 이어가는 맛의 방주 활동이 생겼다. 가족농, 소농을 보호하기 위해 농부와 소비자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농부시장이 여러 지역에서 열리고 있다. 유기농 농사를 짓고, 도시텃밭을 일구는 농부들이 있고, 제철음식을 가르치는 먹거리 활동가들도 있다. 기후위기를 막는 농부와 시민들의 다양한 활동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사회시스템은 변하지 않고 있다.

스마트 그린푸드. 저탄소농축산물인증제는 2015년도에 본격화된 국가인증제도로 유기농·무농약 또는 GAP 인증을 사전에 취득하고 저탄소 농업기술을 활용해 탄소를 줄여 생산한 농산물에 부여하는 국가 인증 제도이다. 농민이 자발적으로 온실가스 감축 사업에 참여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온실가스를 감축하고, 기후변화를 막는 일은 전적으로 농업으로 발생하는 일도, 자발성에 기대어야 하는 일도 아니다.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 각 분야의 시스템을 어떻게 작동시킬 것인지 국가의 전략이 세워지고 이를 위한 체계적 노력이 정부의 책임 아래 실행되어야 한다. 수해 복구와 농민 위로를 넘어 기후위기 시대 국가적 차원의 농업전략이 절실하다. 이런 전략이 세워지지 않는다면 내년에도 농민들은 기후위기로 씨름하게 될 것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이 되지 않도록 기후위기 앞에 지금 당장, 국가차원의 농업전략 마련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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