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박진희 Food & Justice 지니스테이블 대표

지역 농민과 농업에 대한 기본적인 현황 파악이나 충분한 공론화 과정도 없이 여기저기서 푸드 플랜이 논의되고, 농업 미래를 위한 혁신 농정으로 스마트팜이 소개되고, 청년 창업이 강조된다…생명을 가꾸고, 기르고, 먹이고, 자연과 순환하는 ‘농’의 본질이 훼손되지 않는 사회, 먹거리 정의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내가 농촌에 살기 시작한 10년 전 첫해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살아보니 내가 사는 장수는 10월말이나 11월초부터 다음해 3월까지 난방을 해야 할 정도로 겨울이 길고 춥고, 눈이 많은 곳이었는데 그 때는 그것도 모르고 생각보다 빨리 첫눈이 내려서 낭만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부랴부랴 눈을 맞으며 무와 배추를 수확했다. 이게 겨울의 일상이 될 거라는 생각도 못한 채 말이다.

내가 사는 마을은 해발 520m 높은 곳이고 외진 산길이기도 해서 눈이 쉽게 녹지도 않아 겨울이 되면 차가 꼼짝도 할 수 없어 미리 미리 한 짐 가득히 장을 봐다 놓아두어야 하기도 했다. 그래도 줄에 널어놓은 시래기가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마르는 걸 보는 것도 좋았고, 잘 말려두었다가 장에 나가 볶아온 옥수수차가 주전자에서 김을 내뿜으며 끓어오르는 것을 보는 것도 좋았다. 겨울이 걱정이 많은 계절이 될 것이라는 것도 모른 채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신나게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들을 보는 것도 좋았다.

그렇게 하루 이틀, 그렇게 한해 두해 시간이 갈수록 겨울은 낭만에서 점점 멀어지고, 난방 때문에 돈은 외려 많이 들어가는데 돈은 없고, 일도 없는 스산한 계절이 되어갔다. 농사꾼에게 겨울은 쉬는 계절이야, 겨울에는 놀아야지, 이게 자연의 이치에 맞지, 이 겨울에는 못했던 공부를 해야지 하고 머리로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시간만 무심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사과농사를 짓는 분들은 한겨울에도 가지를 치며 농사일을 거듭하고, 시설농사를 짓는 분이나 축산을 하는 분들은 어느 계절이나 일의 양이 다르지 않을텐데 우리같이 논농사, 밭농사를 조금 짓는 사람들은 겨울에 마냥 노는 것이 점점 곤혹스러운 일이 되어 갔다. 어느새 한 명 두 명, 마을 사람들은 겨울에 사과밭에 가지를 치는 일을 하러 가고, 단기로 할 일을 찾아다녔다. 남편도 한겨울이 오기 전, 수확이 끝난 논에 곤포를 만드는 일을 하기도 하고, 고속도로에서 소독약을 뿌리는 방역 일을 하기도 했다.

봄, 여름, 가을에는 농사꾼이었다가 겨울이면 단시간 농업 노동자로 변하는 현실. 농사로 먹고 사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온몸으로 체득하고 또 체득했다. 그렇게 겨우 내내 일을 하고, 쉴 틈 없이 봄 농사 준비를 하고, 여름과 가을을 보내고, 다시 겨울을 맞는 일이 반복되었다. 농사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농촌에서 한해를 보내는 방식도, 농업의 조건도, 농업을 둘러싼 세상은 변하고도 또 변했다. 어디 우리 마을, 우리 집만 그러랴. 내가 산 10년이 아니라 수십년 동안 농촌의 환경은 변하고 또 변했다.

그 변화에 따라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며 도처에서 푸드 플랜 계획을 세우고, 농업의 미래를 위한 대안으로 스마트팜을 이야기하고, 청년창업을 강조했다. 지역 농민과 농업에 대한 기본적인 현황 파악도 되지 않고, 농민과 시민과의 충분한 공론화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여기저기서 연구 논문과 같은, 혹은 복제품같은 푸드 플랜이 논의되고 있기도 하고, 대규모 투자 없이는 불가능한 스마트팜이 혁신 농정처럼 소개되고 있다. 농업의 세대별 징검다리에 대한 고민은 생략된 채 청년 농업 창업이 강조되고 있다.

그 변하는 세상 속에 언론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농업의 소식들도 결이 달라졌다.
양파값 하락. 고춧가루 가격 인상, 쌀값, 기후변화에 따른 과일농가 비상, GMO 감자수입 초읽기, 농정대개혁을 위한 농업계 농성, 모생협의 부당해고 사건, 학교급식사고, 식용란 선별포장업과 수집업, 산란일자 표기 논란… 올해 뉴스로 전해진 농업계 주요 소식들이다. 굳이 좋은 소식을 따지자면 초등학교 돌봄 과일급식 공급이 시작되었다는 소식과 UN의 농민권리 선언 정도랄까. 이 중에서 시민들에게 제대로 전해진 소식들은 무엇일까? 불과 몇 년 전만해도 농업계의 소식은 배추 갈아엎는 농심, 쌀값 하락에 우는 농민처럼 농민의 관점에서 다루어져왔다. 그러던 것이 이제 농산물 가격 인상이 물가 인상의 주범이 되고 있다거나, 식품 사고와 부당해고, 식용란 선별포장처럼 기업형 관리 체계 도입에 따른 갈등과 같은 소식들이 시민들에게 전달되는 농업계 소식으로 굳어져갔다. 언론은 농업을 어느새 경영체로, 소비재를 생산하는 기업으로 다루기 시작했고 또 그렇게 시민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누군가는 소농으로 가족농으로, 또 누군가는 규모 있는 농사로, 누군가는 농업노동자로, 누군가는 농업법인체로, 농업을 하고자 하는 그 모든 방식은 옳고 그름이 없다. 누군가는 농촌에서 일년 내내 일하기를 원하고, 누군가는 계절의 흐름에 맞추어 겨울에 쉴 수 있어야 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농의 본질이 생명을 가꾸고, 기르고, 먹이고, 자연과 순환하는 삶의 가장 기본이 되는 일이며, 공공성을 가진 일이라는 점과, 농민은 존중받고, 농업노동자는 권리를 침해받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농업을 한다는 이유로 경제적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거나 소외되는 상황에 놓이지 않아야 하고, 사회적 환경이 아무리 변화한다 해도 농의 본질의 가치가 훼손됨 없이 인정되는 사회여야 한다는 것이다. 먹거리 정의는 이렇게 단순하고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시작됨을 이 겨울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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