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희 Food & Justice 지니스테이블 대표

먹거리 체계의 공정함과 정의로움에 대해 보다 편하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자리…그리하여 나의 먹거리, 우리 아이의 먹거리를 넘어 이웃집의 먹거리, 우리 동네의 먹거리, 우리 지역의 먹거리, 우리나라의 먹거리에 대해 공감하는 자리가 필요한 때다.


1995년 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좀처럼 잘 볼 수 없는 대만 영화가 극장가에 걸렸다. 집에서는 밤을 세워가며 홍콩무협물과 비디오를 보고, 극장에서는 홍콩 영화를 보던 시절이었으므로, 홍콩이 아닌 대만 영화라는 신선함에 더하여 도무지 무슨 영화일지 종잡을 수 없는 제목에 끌려 극장으로 향했다.

음식남녀. 가족이지만 서로 삶의 거리를 느끼고, 다투고, 삶을 이해하는 평범한 우리네 삶이 음식을 요리하고, 식탁에 마주앉고, 함께 먹는 일상과 함께 잔잔하게 펼쳐졌다. 지금은 줄거리도 가물가물하지만 그 때 영화를 보면서 ‘그렇지, 사는 게 그렇지’라고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음식을 타고 삶이 전해졌기 때문이지 싶다.

2000년대 들어서 나도 한국사람 대부분이 그랬듯이 드라마 대장금에 열광했고, 만화 식객에 열광했다. 권력 암투, 주인공의 고난 극복과 로맨스. 어찌 보면 너무 뻔한 이야기를 가진 드라마였는데 그 뻔한 이야기는 왕의 밥상에 놓일 산해진미를 타고 역대급 재미로 전환되곤 했다. 만화 식객은 재료 하나하나, 음식 하나하나에 인물의 삶이 투영되어 눈물이 핑 돌곤 했는데 사형수와 고구마 이야기에서 나는 급기야 꺼이꺼이 울기까지 했다. 다른 책을 다 접어두고서라도 식객은 전집을 소장하고 싶은 생각까지 일으켰다.

가끔씩 나는 식객을 읽으면서 함께 먹거리 공부를 하는 모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음식남녀가 요리를 통해 우리네 삶을, 대장금이 음식을 통해 권력에 대한 욕망을 표현했다면 식객은 먹거리 체계와 관련된 모든 이들, 생산자, 유통인, 소비자, 요리사가 다 같이 등장하여 생산자의 상황과 생산 과정을 알려주기도 하고, 유통인의 생각과 체계를 알려주기도 하며, 요라사의 삶과 요리하는 과정, 소비자의 삶이 음식에 어떻게 투영되어 있는 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어디 그 뿐이랴. 이 모든 것을 통해 우리를 미식의 세계로 초대해주기도 하니 식객은 그야말로 농장에서 식탁까지를 보여주는 교과서 같기도 하다.

식객으로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2013년 12월부터 뜻을 같이하는 분들과 “먹거리정의를 이야기하는 30인의 밥상”이라는 주제가 있는 밥상 자리를 열어왔다. 먹거리 체계의 공정함과 정의로움에 대해 보다 편하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자리를 만들고 싶어서였다. 농부와 요리사를 소개하고, 의미 있다고 여겨지는 먹거리 공간을 소개하려고 노력했다. 음식에 대한 욕망과 과소비에 대한 이야기, 농축산이주노동자의 노동의 권리, 생물다양성, 토종 종자의 중요성, 먹거리복지의 필요성, 농부를 위한 펀딩, 단작화된 농업의 문제점, 차 마시는 사회에 대한 지향, 남북통일농업까지 먹거리체계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누어 왔다. 그리고 내가 사는 지역인 장수의 농부들과 함께 장수 농산물로 차려지는 밥상 자리를 만들어 농부들이 농사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는 자리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올해 7월부터는 과천분들이 여시는 ‘이야기가 있는 식탁’ 자리에 함께 하고 있다. 7월에 과천에서의 먹거리정의를 주제로 밥상을 연 데 이어 8월부터 12월까지 기후변화 시대 지속가능한 지구를 위한 레시피, 페미니즘과 브런치, 음식과 쓰레기, 식사도구로 보는 식문화, 돌봄 그리고 동네밥상 이야기를 주제로 하는 밥상 준비를 하고 있다.

먹거리정의를 이야기하는 밥상과 장수농부들과 함께 하는 밥상은 전국, 어디에 계시는 누구라도 오시는 자리였던 데 반해 과천에서 진행되는 이야기가 있는 식탁은 과천시민들을 위한 자리다. 지금은 먹을 것을 주제로 하는 밥상 자리가 너무 많아 이런 자리를 식상하게 여기는 분들도 계시고, 또 어떤 때에는 농부를 만나는 밥상, 요리사와 함께 지역농산물로 차려지는 밥상이 유행처럼 보이기도 해서 또 이런 자리야 식상해 하는 소리를 듣겠구나 싶은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먹거리 정의로움이나 공정함을 너무 큰 그림으로만 그려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해 온 것은 아닐까 싶었다. 정주환경이 일치하는 곳, 나의 이웃과 삶의 공통분모를 형성하기 좋은 동네에서 먹거리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먹거리, 우리 아이의 먹거리를 넘어, 이웃집의 먹거리, 우리 동네의 먹거리, 우리 지역의 먹거리, 우리 나라의 먹거리에 대한 공감대 형성과 대안 마련은 이렇게 점점 범위를 넓혀갈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몇해 전에 김포시학교급식지원센터 운영위원회에서 김포로컬푸드밥상을 열면서 학교급식과 로컬푸드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그 밥상에 함께 하셨던 분들은 학교급식 생산자에 대해 이해하는 계기가 되셨으리라. 김포에서 했던 노력이, 과천에서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넘어 우리 동네의 먹을거리 체계를 살펴보고, 보다 더 나은 대안을 찾다보면 의미 있는 변화가 시작될 수 있으리라 믿어본다.

더 나은 먹거리 세상을 위해 우리 동네에서 밥 한번 먹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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