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문제는 이틀 후 싹이 튼 모판을 논에 넣는 일이었다. 인력사무소 여러곳에 연락을 해봤지만 일꾼을 보내기가 쉽지 않은 눈치였다. 단 한 곳에서 ‘사람은 있지만 인건비가 더 올랐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ㅣ 박다니엘 청년농부·전남 영암

아직 농사일이 시작되기도 전인데 마을 할머니 한 분이 집으로 찾아오셨다. 무슨 일인가 싶어 여쭤보니 올해도 모판이며 못자리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하러 오셨다고 했다. 해마다 마을 못자리를 같이 해온 터라 으레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할머니께선 좀체 마음이 놓이지 않으신 모양이었다. 걱정하지 마시라고는 했지만 할머니의 마음처럼 올해 농사를 앞둔 내 마음도 편치는 않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모판을 만들고 못자리를 하는 일은 마을 농가들이 모두 모여 함께 했었다. 작은 마을이라 다 해봐야 몇 농가 안 되지만 따로따로 집에서 모판을 만드는 것보다 볍씨 파종기와 지게차를 이용해 함께 일을 하면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모판을 만드는 날이면 집집마다 한 두 명씩 나와 손을 거들었다. 나이가 가장 많으신 할머니는 파종기 앞에 앉아 모판을 넣어 주시고, 그래도 젊은 편에 속하는 할아버지들은 상토를 파종기에 넣거나 파종기에서 볍씨가 담겨 나온 모판을 팔레트에 가지런히 쌓으셨다. 각자가 농사를 얼마나 짓든지 마을에서 필요한 모판을 전부 만들 때까지 어르신들은 자리를 뜨지 않으셨다.

헌데 얼마 전부터 마을 못자리를 하는 날에도 얼굴을 비추지 않는 어르신들이 생겨났다. 힘에 부쳐 일을 돕기는커녕 바쁜 일터를 더 부산하게 만든다며 일부러 자리를 피해 주신 것이다. 어떤 어르신은 못내 미안한 마음에 직장에 다니는 아들을 불러 일손을 돕게 하기도 하셨다. 그렇게 해가 갈수록 공동작업에 나오지 않는 어르신들이 늘었고, 재작년부터 마을 주민만의 힘으로는 더 이상 못자리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그해부터 외국인 노동자를 불러 일을 하기 시작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 시범을 보여주며 그대로 따라하라고 눈짓 발짓 손짓을 하곤 했다.

그래도 지난해에는 외국인 친구들이 있어 못자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는데, 올해는 농사철이 시작되기도 전에 걱정이 밀려왔다. 코로나19로 외국인들이 국내로 들어오지 못해 일꾼을 구하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들렸기 때문이다. ‘올봄 일은 어떻게 되려나’ 머리를 싸매고 있던 찰나, 이웃마을에 귀향한 청년이 있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연락을 해 보았다. 다행히 일정이 비어 있어 친구와 함께 오겠다고 했다.

부모님도 농사를 지어서 그런지 청년들은 자기 일처럼 일을 해 주었다. 무엇보다 말이 통하니 설명하기도 편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일을 할 수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한 친구는 대학원까지 다니다가 회사 생활을 시작했는데 어려운 일이 생겨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영암 인근인 목포에서 야간에 음식배달을 하고, 마을에 일이 생기면 친구와 같이 이렇게 아르바이트를 하러 다닌다고 했다.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깊은 사정까지는 묻지 못했지만 이런 친구들이 지역에 자리를 잡고 든든한 일꾼이 되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지역에 뿌리내리기 어려운 청년들의 현실을 눈 여겨 볼 때 비록 고향일지라도 녹록치 않은 일이었다.

모판은 젊은 친구들 덕분에 무사히 만들었지만, 문제는 이틀 후 싹이 튼 모판을 논에 넣는 일이었다. 모판작업을 같이 한 마을 어르신들 중에 논에 들어가는 일을 버거워 하시는 분이 있어 일손이 더 필요했다. 인력사무소 한 곳에 연락을 해봤지만 일꾼을 보내기가 쉽지 않은 눈치였다. 전화를 끊고 다른 사무소 몇 군데에 연락해보니, 단 한 곳에서 ‘사람은 있지만 인건비가 더 올랐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인건비는 어찌 되었건 일꾼 세 명을 보내달라고 했더니 아침에 사무실로 데리러 와야 한단다. 당장 부를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지 깊이 안도하며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모판을 옮기기로 한 날 아침, 인력사무실에 들러 외국인들을 태우고 논으로 향했다. 마을 어르신 세 분, 청년 둘,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 셋이 함께 논에 들어가 일을 시작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차에서 내린 외국인 친구들의 낯빛이 흙이 굳지 않은 논을 보고는 금새 어두워졌다. 일을 하려면 논에 들어가야 한다고 해도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며 길가에서 서성였다. 이를 지켜보던 마을 어르신이 어이가 없어 ‘그럼 그냥 가라’고 진담 반 농담 반을 섞어 한마디 하시니, 그 말은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곧바로 가방을 집어 들었다. 모두들 어쩔 줄 몰라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외국인 친구들은 유유히 멀어져 갔다.

모판을 논에 깔려면 몇 사람의 손이 더 필요했지만 모판에서 싹이 올라오고 있어 일을 미룰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로터리 작업을 하러 나간 이웃마을 삼촌에게 도와 달라는 전화를 하고 일을 시작했다. 한 나절이면 마무리 될 일이었는데 일손이 부족하다 보니 점심을 먹고도 한참이 되어서야 마칠 수 있었다. 모판을 만들 때는 쌩쌩하던 청년들도 논에서는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너무 고된 일을 시킨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 이 친구들마저 없었으면 어찌 했을까 싶어 내내 고마웠다. 유난히 일꾼 기근으로 몸살을 앓은 올봄, 여러 사람이 마음을 졸이며 고생해서 못자리를 해낸 만큼 앞으로 어린 모들이 건강하게 자라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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