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다니엘 청년농부·전남 영암

[한국농어민신문]

창 밖으로 모내기가 끝난 옆 논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지켜 보는데, 무거운 눈꺼풀이 내려 앉았다. 봄 일을 모두 마쳤다면 느긋하게 옛 추억에 젖었을 빗소리인데. 아직 태우지 못한 보릿대는 어떻게 하며, 보리나 귀리를 수확도 하지 못한 이웃 농가들은 또 일이 미뤄지겠구나 하는 걱정이 앞선다.

지난 달 초, 모판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다른 해와 달리 유난히 봄 기온이 오르지 않아 모 상자에서 싹이 트기 시작한 모들이 잘 크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5월이 막바지에 이르자, 어느 틈에 햇살은 따가워졌고, 한 낮에는 여름 만큼이나 더웠다. 하나 둘 물을 잡기 시작했던 논들에 모가 심겨지면서, 황량했던 들판이 초록의 모자이크로 채워져 갔다. 키가 훌쩍 자란 모들은 논으로 나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나절에는 그럭저럭 일을 할만 하다. 그렇지만 한 낮의 햇살 아래서 농부는 모판을 나르다가 장갑에 흙이 묻어 있는 것도 잊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친다.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계속된 농번기가 한달에 가까워 지자 풀려가는 다리를 겨우 지탱하며 오후를 지난다. 저리던 손가락에 힘이 빠져 이앙기에 옮겨 싣던 모판을 놓쳐 버리기도 하고, 물장화를 신고 있던 발은 장화와 따로 놀면서 맨발로 진흙탕을 딛기도 한다. 이앙을 마치고 논둑을 돌며 우렁이를 뿌리다가 발이 미끄러져 그만 넘어지기도 한다. 해가 산을 넘어 갈 때 즈음, 떠나갔던 정신이 들어온 듯 하면 그렇게 또 하루 일과가 마무리 되곤 한다.

6월에 들어서자 한층 뜨거워진 햇살 아래 푸르스름하던 보리들이 누렇게 익어간다. 망종이 다가오자 농부들의 마음이 급해진다. 며칠 안에 보리를 베어내고 그 자리에 모를 옮겨 심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른 봄 올해 작황이 좋아 수확이 많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수 차례 내린 봄 비로 보리들이 논바닥에 쓰러졌다. 아직은 덜 익어 푸르스름한 보리들이 누워 있으니 빨리 수확을 해 버릴 수도,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도 없다. 더군다나 쓰러진 보리를 콤바인으로는 수확하기 어렵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다른 지역으로 일을 다니는 크라스 콤바인을 불러다가 수확을 해야 한다. 올해도 마음 급한 누군가가 크라스를 마을로 불러 들이자, 이웃 마을의 농가들도 연락을 닿아 덩달아 수확을 시작 했다.

우리네 보리도 며칠 내로 수확해 주길 부탁하고, 일모작 모내기를 계속했다. 늦은 오후, 이앙기가 모를 심고 나온 논에 남아 보식 작업을 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타다닥 타다닥”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허리를 펴고 돌아봤더니 건너에 있는 보리 논에서 흰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이웃마을 어르신께서 수확이 끝내고 불을 놓으신 것이다.

최근 미세먼지가 심해지면서 보릿대를 태우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한 지적과 고민들이 다시 불붙고 있는 듯 하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던 농민들에게는 어떻게든 빨리 보릿대를 정리하고 논을 갈아 모를 심는 것이 급선무다. 보릿대를 모아 조사료로 사용하거나 다시 땅에 돌려 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일손이 부족하고 지쳐 가는 마당에 이앙을 늦추고 보릿대가 썩을 때까지 기다리든지 하는 방법을 시도해볼 여력은 없는 듯하다.

망종을 하루 앞두고 우리네 보리도 수확을 하고, 부랴부랴 보릿대를 태웠다. 마을 안에 있는 논은 불이 번질 위험도 있고 날도 저물어 미뤄 두었다. 그리고 모내기 하는 틈틈이 짬을 내어 유기질 비료를 뿌리고 로터리 작업을 하려 했다. 일모작 논에서는 몇 주에 걸쳐 준비했던 작업인데, 보리를 심었던 이모작 논에서는 모내기 하는 도중에 하루 이틀 만에 끝내야 한다. 그렇기에 얼마 되지 않는 면적인데도 마음이 바빴다.

점심을 먹고 쉬는 사이, 로터리를 비료살포기로 바꾸어 달아 보리를 갈았던 논으로 갔다. 트렉터에 유박을 싣고 있는데, 느닷없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멀리 산 너머로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이 조금 내리고 지나갈 것 같지는 않았다. 며칠 후에 비 예보가 있어 그 전에 마치려고 서두르고 있었는데, 예보도 되지 않았던 비가 오기 시작하니 짜증부터 났다. 빗줄기가 제법 굵어지자 어쩔 수 없이 트렉터 안에 들어가 창문을 닫았다.

창 밖으로 모내기가 끝난 옆 논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지켜 보는데, 무거운 눈꺼풀이 내려 앉았다. 봄 일을 모두 마쳤다면 느긋하게 옛 추억에 젖었을 빗소리인데. 아직 태우지 못한 보릿대는 어떻게 하며, 보리나 귀리를 수확도 하지 못한 이웃 농가들은 또 일이 미뤄지겠구나 하는 걱정이 앞선다. 그러면서도 몰려오는 졸음을 떨쳐버릴 수 없다.

얼마나 지났는지 빗소리가 잦아들고 눈이 떠졌다. 젖어버린 보릿대는 이제 태울 수 없으니 로터리를 치고 나서 물 속에서 건져낼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막막하기만 하다. 그렇지만 농사 일마다 시기가 있고, 때를 놓치면 한 해 농사를 걸러야 하기에 얼른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한다. 어르신들 말에 눈은 게을러도 손은 부지런하다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소나기 덕에 잠깐 졸았다고 몸은 조금 가벼워 졌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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