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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2030, 그들이 사는 법] 눈에 누워박다니엘 청년농부·전남 영암

[한국농어민신문]

눈 사이로 벼 그루터기만 슬며시 보이는 논으로 들어가 여름날 시원한 물에 뛰어드는 아이처럼 드러누웠다. 깊숙이 눌러 쓴 모자를 밀어 올리자 시리고 푸른 하늘이 보였다. 이 땅을 밟고 흙을 일구며 농사를 지어 왔지만 이렇게 논바닥에 누워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하늘을 우러러 본 적이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올 겨울도 여느 해처럼 따스하게 지나지 않을까 싶었는데 계절이 깊어질수록 눈발이 자주 날렸다. 추위가 기승을 부린다더니 새해가 되자마자 며칠째 큰 눈이 내렸다. 지난 해 같았으며 길 위에 날리던 눈들이 한낮의 햇살에 사르르 녹아 자취를 감추었을 텐데, 이번에는 온종일 살을 에는 듯한 눈보라가 몰아쳤다. 고향으로 돌아와 네 번의 겨울을 지냈지만 지금까지 눈다운 눈을 보지 못하고 겨울을 지냈던 터라 이제 눈을 보는 일이 영영 힘들게 된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는데, 올 겨울은 달랐다. 새벽녘이면 창틀 사이를 비집고 드는 찬 기운을 느끼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웅크린 채 잠에서 깨곤 했다.

서늘한 겨울 입김에 잠이 깨는 그런 새벽이면 발이 빠지도록 눈이 내렸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눈만 오면 재빨리 마을뒷산으로 향하던 발갛게 상기된 아이의 얼굴이 선명하다. 지금은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 없어졌지만, 전에는 땔감을 하러 오르내리던 제법 가파른 길이 있었다. 동생들과 비료 포대를 찾아 그 안에 지푸라기를 구겨 넣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곳으로 달음질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포대를 깔고 앉아 좁다란 산길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일이 뭐가 그리 즐거웠을까 싶지만, 아이들에게 눈 내린 마을 뒷동산은 그야말로 멋진 놀이터였다. 땅 위로 튀어 나온 소나무 뿌리에 엉덩이를 찧거나 중심을 잃어 굴러 넘어지기 일쑤였지만 한나절을 그렇게 오르락내리락 하며 눈썰매를 즐겼다. 놀다가 지쳐 마을에 내려오면 옷이 다 젖어 집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처마에 달린 고드름을 따먹으며 햇볕이 드는 담벼락 아래 쭈그려 앉아 언 몸을 녹이곤 했다.

이제 마을에는 아이 손이 닿을 만큼 야트막한 처마도 없고, 썰매를 타러 뒷동산에 올라갈 개구쟁이들도 사라졌다. 썰매와 고드름을 그리워하는 소년은 어느새 눈이 내리면 걱정이 앞서는 평범한 어른이 되었다. 혹시나 눈이 무거워 하우스가 주저앉지는 않을지, 십여 년 전 폭설에 무너진 축사가 이번에는 무사할지 신경이 곤두선다. 다행히 우리 마을은 수도관이 얼어 한나절 물이 나오지 않고 전기가 잠깐 끊겼다 들어오는 정도였지만, 이웃 마을의 축사에서는 급수 시설이 동파되어 소들이 울고 한 밤 중에 전기가 끊겨 하우스 작물들이 모두 얼어버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남쪽이라 눈이 내리고 추위가 와도 어지간하면 날이 풀리곤 했는데 이번 겨울은 그렇지가 않다. 재설 작업으로 큰길은 녹았지만 마을길은 한주 내내 얼어붙어 있었다. 보름 가까이 쌓인 눈 덕분에 논두렁과 들판은 온통 하얀 세상이 되었다. 처음 며칠은 눈에 갇혀 집에서만 보냈는데 일주일이 가까이 되자 몸이 근질근질했다. 눈이 잠시 그친 오후, 부모님과 함께 밀과 보리를 뿌려 놓은 논을 둘러볼 겸 산책을 나섰다. 눈이 그대로 쌓인 좁은 논길에 들어서자 벌써 부지런한 마을 사람들이 다녀간 발자국이 보였다. 길을 벗어나 논으로 뛰어 든 강아지의 앙증맞은 발자국도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었다.

흰빛으로 채색된 들판 너머로 월출산의 설경이 들어왔다. 사진을 찍으며 뒤쳐져 걷고 있는데 저 멀리 앞서가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길에 누워 있는 아버지를 찍어보라는 것이었다. 길 한 가운데 누워 계신 모습을 잘 담아보고 싶었지만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사진을 찍다 말고 내가 덥석 논으로 들어가겠다고 했다. 평소 같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텐데 눈이 수북이 쌓여서 인지 마음에 용기가 일었다. 눈 사이로 벼 그루터기만 슬며시 보이는 논으로 들어가 여름날 시원한 물에 뛰어드는 아이처럼 드러누웠다. 깊숙이 눌러 쓴 모자를 밀어 올리자 시리고 푸른 하늘이 보였다. 이 땅을 밟고 흙을 일구며 농사를 지어 왔지만 이렇게 논바닥에 누워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하늘을 우러러 본 적이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봄이면 논에 물을 채워 모를 심고 여름내 풀을 뽑아 주며 벼를 길러온 곳인데, 그 품에 안길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에서 바람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가 마치 오래된 친구의 목소리 같은데, 어머니는 사진을 다 찍었으니 옷이 젖기 전에 얼른 나오라고 하셨다.

집으로 돌아와 눈 덮인 논에 누운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하늘이 뭐라고 하더냐’고 묻는 분이 계셨다. 막상 답을 하려니 하늘이 뭐라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마치 꿈은 꾸었는데 무슨 꿈인지 더듬어보아도 좀처럼 생각이 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한참동안 답을 달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가만히 웅얼거렸다. 다음번에 눈이 오면 얼른 나가 눈 쌓인 논에 누워 보겠노라고. 그리고 한참을 누워 하늘 소리를 들어 보겠노라고. 옷이 젖어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나지막한 곳을 찾아 서성여야 한다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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