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다니엘 청년농부·전남 영암

[한국농어민신문]

땅에 발을 딛고 서 보면 실험실의 데이터처럼 작물이 자라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어느 시인이 자신을 키운 것은 팔할이 바람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유기 농사꾼은 최선을 다해 수고하면서도 자기를 둘러싼 모두의 도움이 있어야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사실 앞에 겸허해 진다.


아침나절에 잠깐 흩날리다 멎었던 진눈깨비가 해질녘 잔바람에 다시 날리는 듯 했다. 그러더니 밤 사이 소리 없이 많은 눈이 내렸다. 늦은 밤 잠이 들 때는 바람이 잦아든 것 같아 눈도 그치는가 보다 했는데,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장독대 위에는 한 뼘도 넘는 눈이 쌓여 있다. 올 겨울은 제법 따스했던 지라 눈을 보기 어려웠는데, 2월이 시작되자마자 제법 많은 눈이 온 것이다. 마을은 온통 하얀 세상이 되었고, 겨우내 유일하게 푸른 빛을 띠던 보리밭도 온통 눈에 덮여 보리가 자라고 있는지 모를 정도다.

지난 가을, 벼를 베면서 뿌려 놓았던 보리 씨앗이 드문드문 싹만 틔우고 겨울을 맞았다. 다른 해 보다 따듯했던 겨울이어서인지 평년보다 성장 속도가 빠르다는 소식이 들리지만, 유기농으로 기르고 있는 우리네 보리는 그리 잘 자라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눈이 그치고 나니, 점차 푸른색이 짙어가는 다른 밭들과 달리 유기농 보리 작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게 확연하다. 벼농사는 우렁이 덕분에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고 기르는 재배법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싶은데, 벼를 수확한 논에 이모작으로 가꾸는 보리 농사는 매번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는 느낌이다.

보리 농사는 늦은 가을에 종자를 파종하여 겨울을 나고 늦은 봄 수확을 한다. 모판을 만들고 이앙을 하고 여름내 풀을 매야 하는 벼농사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인 것 같지만, 관건은 보리와 함께 자라는 풀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좋은 농약들이 그 수고를 덜어주지만, 유기농으로 가꾸려면 제초제를 쓸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뾰쪽한 수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가을에 비가 적당히 와서 보리 종자가 싹을 잘 틔워 일찍 키가 자란 경우에는 관행농의 방법으로 재배해도 괜찮지만, 늦가을에 비가 많이 온다든지, 고랑이 패이거나 지대가 낮아 물이 잘 고이는 밭에서는 보리가 싹을 틔우기도 전에 풀이 우거지기 시작한 경우가 많았다.

궁리 끝에 몇 해 전부터 시도하고 있는 방법 중 하나는 볏짚을 이용하는 것이다. 관행농에서는 벼를 수확하고 나면 볏짚을 거둬 낸 후에 로터리를 치고 보리 씨앗을 뿌린다. 물론 이때 제초제도 함께 뿌려 풀이 나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 우리는 추수를 시작하기 직전에 익은 벼들 사이에다 보리 종자를 뿌린다. 그리고 콤바인으로 나락을 거두고 나온 볏짚을 잘게 썰어 갈퀴를 가지고 다니면서 논 전체에 고루 펼쳐 덮어 준다. 햇볕이 땅에 닿지 못하도록 볏짚을 덮어 풀이 자라지 못하는 조건을 만들어 주고, 겨우내 썩어가는 볏짚 사이로 보리만 자랄 수 있게 해 볼 요량이었다. 성공만 한다면 로터리를 치지 않아도 되니 일감도 덜고 에너지 사용도 줄이며 유기농 보리도 기르는 일석삼조의 방법이다.

처음 시도했을 때는 관행농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나름 괜찮은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방법도 완벽하지는 못했다. 벼의 품종에 따른 차이도 있지만 논 전체를 덮어줄 만큼 충분한 볏짚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그럴 경우 볏짚 틈새로 올라오는 풀을 막을 수 없었다. 늦가을에 비가 좀 많이 오거나 추위가 일찍 찾아오면 풀은 그렇지 않은데 보리의 발아율이 급격히 낮아져 봄이 되어도 보리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전 해에는 그럭저럭 괜찮았던 논에서도 다음 해에는 풀이 보리보다 웃자라는 경우도 있었다. 지난해에는 ‘풀반, 보리반’이 되어 수확을 포기한 밭도 있었다. 올해 마을 앞 보리밭에도 파종을 조금 늦게 해서인지 눈이 다 녹았는데도 드문드문 돋아있는 싹들마저 기를 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과거와 달리 농업 분야에서도 많은 연구들이 축적되었고, 각 작물에 적합한 새로운 재배법들도 많이 소개되고 있다. 최근에는 사물인터넷을 이용해 작물이 자라는데 최적의 조건을 제공하는 스마트 농업이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땅에 발을 딛고 서 보면 실험실의 데이터처럼 작물이 자라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어느 시인이 자신을 키운 것은 팔할이 바람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유기 농사꾼은 최선을 다해 수고하면서도 자기를 둘러싼 모두의 도움이 있어야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사실 앞에 겸허해 진다. 유기농이란 단지 화학비료와 농약을 쓰지 않는 농사가 아니라 하늘의 순리에 순응하며 함께 살아가는 삶이니 말이다.

그나저나 보리밭에 거름부터 내야겠다. 다음 주 초에는 추위가 누그러져 겨울비가 제법 온다는 소식인데, 비가 오기 전에 웃거름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보리밭에 뿌린 거름이 비에 녹아 들면 보리가 기지개를 펴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얼른 키가 자라야 풀에게 지지 않고 따스한 봄바람이 불 때 즈음, 보리밭 사이에서 풀피리를 불 수 있지 않겠는가. 몸은 아직 웅크리고 있는데 비가 온다는 소리에 농부의 마음이 다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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