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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2030, 그들이 사는 법] 우리 마을 운동회

[한국농어민신문]

박다니엘 청년농부·전남 영암

학교가 자리 잡은 마을 어른들 뿐만 아니라 이웃 마을 이장님들까지 모셔서 어린이들과 함께 뛰고 음식도 같이 나누는, 온 마을이 함께하는 운동회.…아직 이름도 잘 모르고 어느 마을에 사는지도 모르지만 아이들은 어른들이, 어른들은 아이들이 이웃에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정 즈음, 요란한 소리에 잠이 깼다. 한동안 천둥번개가 치더니 우두둑 빗소리가 들렸다. 많은 양은 아닐 거란 예보가 있었지만 내심 걱정이 앞섰다. 오늘은 우리 마을 초등학교에서 운동회가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동이 트기 전까지 비가 내렸던 것 같은데, 아침을 먹고 나가보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역시나, 다행이다. 학교 행사가 있다하면 일기예보가 좋지 않아 며칠간 걱정을 하다가도, 행사를 진행할 날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날씨가 좋아지곤 했다. 오늘도 그랬다. 특히나 이번에는 마을 어르신들을 모시기로 한 터라 계획했던 마을 운동회에 차질이 생길까 염려가 되었는데,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농촌의 어느 지역에서든 학교를 통폐합한다는 소식은 더 이상 화젯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고향을 떠나 있던 동안 모교의 폐교에 대한 주민 설문조사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몇 차례나 들었다. 내가 졸업할 때 우리 반이 36명이었는데, 이제 전교생이 30여명 밖에 안 되고, 두 학년을 통합해 운영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들릴 때면, 모교도 곧 문을 닫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학교는 나의 예상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여섯 해 전 부임하신 교장 선생님께서 트리플교육공동체를 통해 교직원 뿐 아니라 학부모와 지역 주민이 함께 교육계획을 세우고, 학생들의 의사까지 반영하여 학사 일정을 운영하기 시작하셨다. 처음부터 순조롭지는 않았겠지만, 학부모와 지역주민들이 참여하면서 마을 주민들이 선생님이 되고 마을이 교실이 되어갔다. 학부모와 마을 주민들이 함께 준비해 별빛 축제를 진행했고, 마을 농민이 선생님이 되어 작두콩을 기르고 차를 만들어 판매 수익금으로 불우이웃을 돕는 활동까지 배울 수 있게 했다. 재작년 가을에 새로 오신 교장 선생님께서는 마을과 학생들의 활동에 더욱 적극적이셨다. 직접 관리기를 몰며 텃밭을 만드셨고, 그곳에서 학생들은 계절에 따라 사탕수수 수확과 밀 밀어먹기 체험을 통해 추억을 만들었다. 지난 해에는 전남마을공동체만들기지원센터의 ‘돌멩이와 풀뿌리 학교’ 시범사업으로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돌아보는 씽씽바이크를 진행했고, 참가자들이 모두 함께 하는 공동체 밥상으로 한 해를 마무리 했다. 이러한 활동들이 알려지면서 참다운 자녀 교육을 고민하던 가정들이 지역에 찾아와 정착하기 시작했고, 인접해 있는 읍소재지에서도 학생들이 오면서 다시 활력이 넘치는 학교가 되었다.

올 해는 봄 운동회 때 지역 어르신들을 모시고 체육활동과 공동체 밥상을 함께하며 한 해 활동을 시작하기로 했다. 학교가 자리 잡은 마을의 할머니 할아버지들 뿐만 아니라, 이웃 마을 이장님들까지 모셔서 어린이들과 함께 뛰고 음식도 같이 나누며 마을과 아이들을 더 가깝게 하는 계기를 삼기로 한 것이다. 더 이상 학교와 학생들만의 운동회가 아닌 온 마을이 함께하는 운동회가 되도록 말이다.

이른 아침부터 운영위원회와 학부모회에서는 운동장 한 켠에 천막을 치고 앉을 자리를 마련했다. 이틀 전 부터 장만한 음식을 날라 오고, 드럼통으로 만든 화로에 숯을 넣고 불을 붙였다. 한 분 두 분 마을 어르신들이 찾아오셨고, 어린이들은 준비운동을 하며 운동회의 막이 올랐다.
마을 어른들이 오시긴 했지만 천막 아래에 앉아 아이들을 지켜보고 계실 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서먹서먹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학생들의 달리기 경기가 끝난 후, 이인삼각 경기를 위해 벤치에 계신 어른을 한 분씩 모셔오라는 선생님의 안내 방송이 있자, 어린이들이 모두 천막 쪽으로 달려 나왔다. 엄마나 아빠한테 달려간 친구들도 있었지만, 가족들이 참석하지 못한 친구들은 마을 어른들 주위를 맴돌았다. 내 옆에도 수줍게 얼쩡거리는 친구가 있어 손을 내밀었더니 이내 얼굴이 환해졌다. 어른들과 아이들은 발을 묶고 하나가 되어 자기 차례가 되면 바통을 받아 뛰어나갔다. 이인삼각 경기가 끝나자 어린이들은 팀별로 모여 앉았고, 어른들은 돼지 몰이 경기를 이어갔다. 축구공 만한 돼지저금통을 빗자루로 몰아 반환점을 돌아오는 릴레이 경기가 펼쳐졌다. 어린이들은 자기 팀이 이기라고 소리를 쳤고, 어른들은 처음이라 어색하지만 승리를 위해 돼지를 몰았다. 아이들과 함께 한바탕 뛰고 난 어른들은 천막 아래 모여 앉아 과일과 떡을 나누고, 아이들의 경기를 지켜보며 응원을 보냈다. 경기를 마친 아이들은 어른들 옆으로 와서 인사를 하고 음료수를 마시며 목을 축였다.

아직 이름도 잘 모르고 어느 마을에 사는지도 모르지만 아이들은 어른들이, 어른들은 아이들이 이웃에서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은 학교로 마을 어르신들이 찾아와 주셨는데, 다음 달에는 어린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마을로 나갈 계획이다. 마을 구석구석을 돌며 논 밭에서 일하시는 어르신들께 힘내시라고 응원을 보낼 것이다. 오늘 우리를 응원해 주셨던 것처럼. 그래서 또 한 번 우리 마을 운동회를 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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