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다니엘 청년농부·전남 영암

[한국농어민신문]

농산물 생산을 위해서 적잖게 탄소를 배출하는 농기계를 사용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다음 세대의 자원을 끌어다 오늘의 먹을거리를 일구는 것이니 생각해보면 선을 넘는 일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옛날 방식으로 돌아갈 수도 없어 고민을 할수록 막막함이 밀려왔다.

7월 하순이 되어 가는데도 장맛비 예보가 그치질 않았다. 아침이 되면 구름이 잔뜩 껴 비가 올 것 같다가도 잠깐 해가 뜨거나 온종일 구름만 가득한 날들이 이어졌다. 언제 비가 오려나 예보를 다시 확인해 보면, 새벽부터 내린다던 비는 오후 늦게나 다음 날로 미뤄져 좀처럼 날씨를 예측할 수 없었다. 마지막 옥수수를 딸 시기가 되었는데도 여러 날 흐리고 비가 내려서인지 옥수수 알이 잘 여물지 않았다. 미루고 미루다 지난 주 초에야 겨우 수확을 마치고, 곧장 옥수수대와  비닐을 걷어내려 하는데 또 비소식이 들렸다.

지난 봄, 옥수수를 심을 때는 마을 할머니들이 일손을 거들어주셔서 제법 많은 양이었지만 모종을 수월하게 옮겨 심을 수 있었다. 그런데 사람 키보다 큰 옥수수대를 베어내는 일은 힘이 많이 들 뿐 아니라 뙤약볕에 어르신들의 건강을 해칠 수 있어 아예 도움을 청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날씨가 믿을만했다면 가족들끼리 한 주에 걸쳐 새벽녘과 해질녘에 베어보려 했겠지만, 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들이 계속되는 터라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내버려두면 여름내 풀이 무성해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을 맞을 것이기에 어떻게든 빨리 정리를 해야 했다.

뉴스에서는 연일 장마가 길어져 8월 초순까지 계속될 거라고 했다. 비가 그쳐도 땅이 마르지 않으면 장화에 흙이 달라붙어 걸음은 무겁고, 비닐에 붙은 흙도 털어내야 하기에 일은 몇 배로 고생스러울 게 분명했다. 그래도 장마의 틈바구니에서 비가 그친 맑은 날이 있기를 고대하며 속을 태웠다. 그렇게 맑은 날을 기다리다가도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기 전에 어떻게든 작업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찌는 듯한 8월 한낮에 밭에 서 있을 일은 상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날씨야 어떻든 7월 마지막 날 옥수수밭 설거지를 하기로 했다. 외국인 친구들도 후덥지근한 날씨에 일하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자라왔던 고국의 날씨와 비교하면 그래도 할 만하다며 비만 오지 않으면 오겠다고 했다.

오랜만에 오후부터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맞는지 이른 아침에는 하늘이 잠잠해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밭두둑에 서 있는 옥수수대를 베어 옆으로 던져 놓으면, 다음 사람이 뒤따라가면서 옥수수의 그루터기 부분을 발라내고 흙으로 덮은 비닐을 걷어 냈다. 헌데 고랑과 비닐 틈 사이로 풀이 무성한 경우가 많아 풀을 뽑고 나서 비닐을 걷어내고, 거기다 비닐에 걸린 풀뿌리까지 털어내야 했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일은 더 더뎠다. 비닐을 안 쓰면 좋겠지만 그러면 풀이 옥수수의 생장을 지나치게 방해할 것 같아 최소한으로 사용했는데, 수확을 마치고 걷어내려 하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해가 기세를 떨치기 전인 아침나절에는 괜찮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새참을 먹고 일을 계속 해 가려는데 구름 사이로 해가 나왔다. 금세 이마와 등에서는 땀이 흐르고, 허리를 펴 하늘을 보니 현기증이 났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산 너머에서 몰려온 구름이 소나기를 살짝 뿌려주고 지나가 잠깐이지만 열을 식힐 수 있었다. 외국인 친구들 역시 더위에 지친 기색이었지만, 오후에 비가 오면 어떻게 할거냐고 묻자 그래도 끝까지 일을 마치고 가겠다고 야무지게 말했다.

점심을 먹고 잠시 쉬었다가 남은 옥수수 밭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비가 오면 좀 시원하겠다 싶었는데, 기다리는 비는 오지 않고 오히려 쨍쨍 햇발이 비쳤다. 땀으로 흠뻑 젖은 데다 햇볕까지 내리쬐니 점점 몸이 달아올랐다. 숨은 가빠지고 얼굴이 벌게지면서 더는 못하겠다 싶었다. 문득 논 농사처럼 콤바인이나 트랙터 같은 기계를 써서 옥수수 밭을 확 밀어버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다 이번 여름 기후변화에 관련된 책에서 읽었던 내용들이 스쳐지나 갔다. 인류는 화석연료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 동안 배출된 이산화탄소가 지구의 평균 온도를 1도 상승시켰고, 그로 인해 지구 곳곳은 이상 기온 현상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어느 책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금처럼 에너지를 사용한다면 3.4개의 지구가 필요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농산물 생산을 위해서 적잖게 탄소를 배출하는 농기계를 사용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다음 세대의 자원을 끌어다 오늘의 먹을거리를 일구는 것이니 생각해보면 선을 넘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기존 생산방식을 멈추고 옛날 방식으로 돌아갈 수도 없어 고민을 할수록 막막함이 밀려왔다. 사람이든 화석 연료든 다른 누군가의 힘을 빌려야만 하는 우리의 생활 방식을 생각하니 농부로서 기후변화에 기여할 만한 일상이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외국인 친구들이 없다면 계속되는 장마에 베지 못한 옥수수 밭이 삽시간에 풀숲이 되어 버릴 것이고, 트랙터와 콤바인 없이는 쌀 한 톨도 밥상 위에 올리기 힘드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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