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다니엘 청년농부·전남 영암

[한국농어민신문]

딱히 시도해볼 만한 다른 작물이 떠오르질 않았다. 벼농사 못자리를 시작하기 전에 모종을 키우고 이식까지 마치려면 마냥 결정을 미룰 수도 없었다. 그렇게 또 다시 옥수수를 심기로 했다. 지난해보다 몇 배나 많은 옥수수를 어떻게 팔아야 할지를 생각하면 눈앞이 자꾸 흐려졌지만 말이다.


해마다 봄이 되면 집을 에워싸고 있는 빈 터에 옥수수를 심는 것으로 한해 농사를 시작한다. 유기농 벼농사를 지으면서 텃밭에도 농약을 뿌리지 않고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을 찾다가 수년째 옥수수를 심고 있다. 옥수수는 다른 작물보다 양분을 많이 필요로 해 봄이 되면 겨우내 모아 둔 퇴비를 유박과 함께 뿌려 지력을 보충해 주곤 한다. 그런데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가 갈수록 옥수수의 크기가 작아지는 것 같아 자꾸 신경이 쓰인다. 관행 농법처럼 요소 비료 한 줌이면 크고 튼실한 옥수수를 얻을 수 있지만 유기농이니 그럴 순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비료를 쓰지 않아 크기가 작으니 이해해 달라고 고객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일도 마음이 편치 않다. 유기농의 기본인 윤작법을 떠올려 보아도 같은 작물을 한 곳에 계속 심는 것은 좋지 않겠다 싶어 올해는 가족들이 먹을 만큼만 옥수수를 심고 나머지 땅은 논을 만들어 벼를 심어볼 계획이었다.

지난해 옥수수 밭에 남아 있는 비닐필름만 정리하고 나면 올해 밭일은 많지 않겠구나 싶었는데, 배짱이 흉내를 내고 싶어 간질간질한 얼치기농부를 알아채기라도 한 듯 이웃집 할머니께서 찾아오셨다. 뜻밖에 할머니께선 본인이 경작하시던 마을 뒤편 논을 넘겨 받으면 어떻겠느냐고 물으셨다. 서울로 올라간 친지가 임대로 내주었던 것인데 이제 팔겠다고 연락이 왔다며 그 땅을 소개해 주셨다. 농사를 처음 시작하던 해에 빌려 벌었던 논의 절반 정도가 지난해 다른 이에게 넘어가면서 농사 지을 땅을 구하지 못해 걱정하고 있던 터라 감사하기는 했지만 내심 구입비용이 부담스러웠다. 해서 농어촌공사의 지원을 받아 거래를 하면 가능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그 땅을 사기 위해 현금을 지불하겠다는 사람도 있지만 잘 이야기해 보자고 하셨다.

청년농부들에게 우선권을 주는 정책 덕분에 농어촌공사의 지원을 받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필요한 서류들을 모두 준비해 계약을 하려고 하자 담당자는 지원받은 농지에 2년 동안 타작물을 심어야 한다고 말했다. 짐작하기론, 두 해 전 ‘쌀생산조정제’가 시행되면서 정부가 농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했지만, 자발적인 참여에는 한계가 있어 정부기관 사업에 대한 타작물 재배를 의무화한 것 같았다. 소비는 줄고 묵은쌀이 쌓여가는 상황에서 쌀값 폭락을 막기 위한 정책이라지만 벼를 심던 논의 토질과 농사현장에 대한 고려가 부족한 것 같아 보안이 필요하겠다 싶었는데, 공사의 지원을 받는 농지에 대해서도 적용이 되는 줄은 미처 몰랐다. 어찌되었든 시기를 놓치면 한 해를 그냥 흘려 보내야 하는 것이 농사이다 보니 어떤  대안이든 찾는 수밖에 없었다.

답답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논에 벼가 아닌 타작물을 심어야 한다고 이웃집 할머니께 말씀드렸다. 할머니께선 논에 수렁이 있어 물이 잘 빠지지 않는데 비가 조금만 와도 물에 잠길 것이 뻔하다며 펄쩍 뛰셨다. 그렇다고 굴삭기를 불러 수로 작업을 했다가 2년 후에 다시 밭을 논으로 만들려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 연출될 것이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담당자에게 사정을 말했더니 같은 면적의 다른 농지에 타작물을 심어도 된다며, 단 지난해에 벼농사를 지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농지여야 한다고 답했다. 간신히 마을 어르신들 논 중에서 물 빠짐이 좋아 밭으로 쓸 수 있는 땅을 찾아 주인 어르신께 상황을 말씀드리고는 곧장 대체 농지로 등록해  밭작물을 심기로 했다.

한고비를 넘고 났지만 어떤 작물을 심어야 할지 또 고민이 이어졌다. 면적이 넓어 단박에 결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이웃 면에 사는 형님이 논에 콩을 심는 것이 떠올라 물어보니 기계로 콩을 심어 줄 수 있다고 했다. 콩을 심으면 되겠구나 싶었는데 부모님의 생각은 다르셨다. 제초제를 하지 않으면 숲처럼 우거지는 풀들 사이에서 콩을 제대로 거두기 어려울 거라며, 중간에 농약을 뿌려야 할 상황이라도 생긴다면 지금까지 친환경인증을 받아온 논을 다시 무농약인증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부담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부모님 말씀처럼 무농약 인증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5년이 지나야 유기농 인증을 받을 수 있으니 오히려 더 큰 손해를 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빠져나오나 싶었더니 다시 고민의 늪으로 걸어 들어갔다.

며칠을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아버지 친구 분이 올해 단호박을 심는다는 소식을 듣고 종자를 구하러 나섰다. 이번에야 말로 찾았구나 싶었는데, 아버지의 벗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는 이내 실낱같던 희망을 잠재웠다. 업체에서는 친환경 단호박은 취급을 하지 않을 뿐더러, 단호박은 무름병에 약해 농약을 쓰지 않고는 수확하기가 어려울 거라는 얘기였다. 덕분에 논을 ‘밭답게’ 만들려면 ‘무얼 심어야 하나’라는 고민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머릿속을 헤집어 보아도 지금까지 심어온 옥수수 외에는 딱히 시도해볼 만한 다른 작물이 떠오르질 않았다. 벼농사 못자리를 시작하기 전에 모종을 키우고 이식까지 마치려면 마냥 결정을 미룰 수도 없었다. 그렇게 또 다시 옥수수를 심기로 했다. 지난해보다 몇 배나 많은 옥수수를 어떻게 팔아야 할지를 생각하면 눈앞이 자꾸 흐려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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