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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2030, 그들이 사는 법] 겨울잠

[한국농어민신문]

박다니엘 청년농부·전남 영암

모두가 다른 배경에서 각자의 사연을 안고 새로운 둥지를 찾아 농촌으로 왔는데, 마을로 들어오는 일도, 마을에 정착해서 살아가는 일도 결코 녹록치 않다는 것에 격하게 공감하며 모임이 마무리 되곤 한다.…어느 일이든 그렇지 않겠는가 마는, 이 땅에서 먹을거리를 기르며 먹고 사는 삶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는 것에 조금씩 눈을 뜨게 된다.


며칠을 앓았다. 사실 지금도 앓고 있다. 몹시 추울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포근한 날들이 많아 올 겨울은 이리 저리 돌아다니기 좋겠다 싶었는데, 미세먼지 때문인지 그리 차지도 않은 바람에 잘 버텨 주던 몸이 그만 탈이 났다. 몸이 잠깐 오싹했는데, 눈이 붉게 달아올라 가라앉지를 않는다. 서울 살면서는 일주일에 하루 이틀 당연한 듯 여겼던 눈의 통증을 요 며칠 다시 느끼고 있다. 시골로 내려와 몸으로 일 하면서 한동안 잊고 지냈던 통증이다.

지난 여름, 이번 가을일만 마무리되면 꼭 손전화가 터지지 않는 곳으로 떠나겠다고 다짐했건만, 농번기가 지나고 뭐 딱히 하는 일이 없는데도 마음을 내지 못하고 있는 사이 이렇게 겨울 날이 흘러가고 있다.

몸이 많이 고달프긴 하지만 어려서부터 부모님께서 하시는 일을 어깨너머로 보고 도와 왔던 터라 농사 일이 낯설지는 않다. 바쁜 것도 한 철이라 생각하면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그렇지만 제 버릇은 개 못 준다고 글을 읽고 나누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지내는 것은 못내 허전하다. 가끔 괜찮은 강의나 모임이 있으면 서울이나 홍성 등을 오가곤 하지만, 농사를 지으며 시간을 내는 것도, 장거리 운전을 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지난 여름부터 옆 마을에 내려와 토마토 하우스를 짓기 시작한 형님 부부를 꼬드기기 시작했다. 농약을 쓰지 않고 농사를 짓고 싶으면, 그래도 유기농업과 미생물에 대해서 좀 알면 좋지 않겠느냐고. 올 겨울에는 쉬엄쉬엄 공부 모임을 해 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모일 장소가 마땅치 않지만 형님 하우스 관리사에서 하면 괜찮을 것 같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소근거렸더니 그래 보자고 해서 이웃에 사는 젊은이들 몇이 모여 공부 모임을 시작했다.

같이 책을 읽어보자고 모이긴 했지만, 전공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들 책에서 손을 놓은 지도 오래기에 농한기라고 하지만 공부에 집중하기는 쉽지 않다. 처음에는 읽어 오기로 한 범위를 요약 정리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조금 어려운 내용이 나오면 무슨 말인지 몰라 서로 헤매기 십상이다. 간혹 아는 내용이 나오거나 농사를 지으며 겪은 일들이 있으면 그 경험이 모두의 선생님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 인터넷에서 관련 자료를 찾아와 함께 나누어 주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이내 이야기는 우리네 삶으로 옮겨간다. 귀농한 지 4년 차가 되어가는데 마을에 사는 이웃 때문에 지난 주말에 또 눈물바람을 했다는 이야기, 농사를 지어 보겠다고 영암으로 내려온 지 한 해가 다 되어가는데도 아직 마땅한 땅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 정부의 지원 사업들이 많다지만 처음 시작하려는 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인 경우가 많고, 어떻게 해서 농사를 시작해도 초보 농부에게는 생활비조차 충당하기 어려운 농산물 가격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약속했던 시간이 훌쩍 지나 있다. 모두가 다른 배경에서 각자의 사연을 안고 새로운 둥지를 찾아 농촌으로 왔는데, 마을로 들어오는 일도, 마을에 정착해서 살아가는 일도 결코 녹록지 않다는 것에 격하게 공감하며 모임이 마무리 되곤 한다.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공부라는 것을 해 보겠다고 은사님을 찾아갔던 때가 생각난다.

졸업을 한 학기 정도 남겨두고, 4년 동안 역사와 문학 수업을 통해 학문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감동을 주셨던 선생님의 연구실을 처음 찾아갔다. 뭐 하러 왔냐고 물어보셔서, 대학원에 진학하여 공부를 계속하려고 한다고 말씀드렸더니, 단박에 먹고 살기 힘드니 하지 말라고 한 마디 하시고는 다른 약속이 있다며 나가셨다. 그 때는 당신께서 평생 그 일을 해 오셨고 지금도 그리하고 계시면서 나에겐 하지 말라고 하신다고 서운했는데, 이제와 돌이켜 보면 선생님께서는 전에도 그와 같은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역사 수업 첫 시간에 김광규 시인의 ‘묘비명’을 읽히신 적이 있는데, 시를 통해 역사가가 다루는 과거에 대한 기록이 갖고 있는 속성에 대해 고민해 보게 하셨다. 그러면서 인류의 역사란, 기록을 한 사람이나 기록에 남겨진 사람이나 이 땅에서 각자가 짊어지고 있는 먹고 살아가는 삶의 무게라는 것을 알려 주시고자 하셨던 것이 아닐까.

농사를 지으며 먹고 사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 온지 두 해가 지나간다. 어느 일이든 그렇지 않겠는가 마는, 이 땅에서 먹을거리를 기르며 먹고 사는 삶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는 것에 조금씩 눈을 뜨게 된다. 그나저나 잠을 자야겠다. 겨울이 다 가고 봄이 오기 전에. 그래야 앓던 눈도 가라앉고, 어렴풋이 꿈도 꿀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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