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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2030, 그들이 사는 법] 봄 바람의 흔적

[한국농어민신문]

박다니엘 청년농부·전남 영암 

자전거를 타고 마을 고샅을 지나 들판에 들어서니, 겨우내 멈춰 있던 것만 같던 들판은 봄 바람을 맞으며 다시 기지개를 켜는 것 같았다. 아직 풀만 조금씩 자라고 있는 논들도 많았지만, 벌써 물을 가두기 시작한 논도 있었다. 군데군데 보리도 익어가고 있었다.


지난 달 동네 어린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한바퀴 돌자고 했는데, 마침 약속한 날 마을 운동회가 잡혔다. 학교내 공사로 인해 운동회 일정이 앞당겨진 것이다. 한 달에 한 번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함께 돌기로 한 ‘씽씽바이크’ 일정은 아쉽지만 뒤로 미루기로 했다. 대신 어린 친구들에게 다음 달에는 꼭 자전거를 타자고 약속을 했다.

한 달이 다 되지 않았지만 시간을 내어 학교를 찾았다. 농번기가 시작되면 친구들과 한 약속을 지키기 어려워질 것 같아서다. 이런 저런 행사가 많은 5월이었지만, 학교에서 틈을 내어 일정을 잡아 주셨다. 그 즈음 집에서는 모내기 준비를 했는데, 하루 앞 날 육묘 상자를 담고, 하우스에 쌓아 두어 싹이 나기를 기다렸다가 다음 날 논으로 옮기기로 했다.

약속한 날이 되어 학교에 갔더니 친구들은 며칠 전부터 자전거 타는 연습을 했다고 야단들이다. 지난 해에는 참여하지 못했던 저학년 학생들도 학교에서 새로 구입한 네발 자전거로 열심히 운동장을 돌았다고 했다. 그렇지만 네발 자전거를 타고 여러 마을을 돌아오기는 힘들 것 같아 이번에는 체육 선생님과 학교 안에서 타는 것으로 대신 하자고 했다. 두발 자전거를 어느 정도 탈 수 있는 친구들만 마을로 나가기로 했다. 지난 해 몇 차례 ‘씽씽바이크’에 참여한 친구들이 먼저 안전모를 쓰고 무릎 보호대를 착용하며 자전거 탈 준비를 했다. 준비 운동을 마치고 선배들이 앞장서서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나서 교문을 나섰다. 이제 막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후배들이 뒤를 따랐다.

작년 가을, 마지막으로 자전거를 탔던 때는 들판에서 가을걷이가 한창이었다. 누런 벼논들이 하나 둘 구멍이 뚫리는 것처럼 비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자전거를 타고 마을 고샅을 지나 들판에 들어서니, 겨우내 멈춰 있던 것만 같던 들판은 봄 바람을 맞으며 다시 기지개를 켜는 것 같았다. 아직 풀만 조금씩 자라고 있는 논들도 많았지만, 벌써 물을 가두기 시작한 논도 있었다. 군데군데 보리도 익어가고 있었다. 길을 따라 고추 모종을 심고 비닐 터널을 덮어 놓은 밭도 있었다.

들판을 지나 도착한 마을 회관 앞 공터에서는 어르신 몇 분이 육묘 상자를 만들고 계셨다. 상토와 흙을 섞어 담은 상자를 수 십장 가지런히 펼쳐 두고 그 위에 물을 주고 나서 볍씨 종자를 뿌리셨다. 다시 상토가 덮인 모 상자는 공터 한편에 겹겹이 쌓였다. 칠순이 넘으신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이웃들과 품앗이로 서로의 못자리를 준비하시는 것 같았다. 못자리만 잘해 놓으면 심고 거두는 것은 기계가 대신 해 주니 못자리가 끝나면 한 해 농사의 절반은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도, 이제 이마저도 힘들어서 내년에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들 하셨다.

마을이 끝나가는 곳에 있는 ‘배 고픈 다리’를 건너 다음 마을을 향해 페달을 굴렸다. 벌써 논 한 켠에 못자리판을 만들어 놓은 논도 있었다. 포장을 덮어 놓은 육묘 상자 안에서 싹이 올라오면 못자리판에 모를 옮기기 위해 미리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조금 더 가다 보니 이미 육묘 상자를 옮겨 부직포를 덮어 놓은 논도 있었다. 저 멀리 길 건너에서는 모판을 논으로 옮겨 깔고 그 위에 물을 뿌려 주고 계셨다.

다음 마을로 가기 전 길가에 있는 정자에 앉아 잠시 쉬어가기로 했는데, 지난 여름 그늘 아래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셨던 어르신들을 뵐 수는 없었다. 모두들 논이며 밭으로 일을 나가셨을 것이다. 마을을 돌아가는 신작로에 무성해진 가로수 나무 그늘 아래로, 자전거들이 봄 바람을 맞으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지나게 된 마을은 소를 키우는 농가들이 많아서 인지, 아직 못자리를 시작할 채비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논에는 조사료용 풀이 많이 심겨져 있었는데, 얼마 전까지도 싹만 올라와 있더니 어느새 키가 다 커 있었다. 봄 바람을 따라 고개를 흔들며 거두어 들일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을 어귀에 있는 집에서는 할머니께서 텃밭에 심어둔 마늘과 양파에 물을 주고 계셨다. 계속되는 봄 가뭄에 속이 들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에 그냥 두고 보지 못하신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돌아온 마을에 있는 하우스에서는 이제 막 토마토들이 붉게 익기 시작하여 순을 치고 수확을 하느라 정신 없이 바쁜 듯 했다.

한 낮에는 제법 더웠지만, 페달을 밟으면 얼굴을 스치는 봄 바람에 상쾌하게 달릴 수 있었다. 학교로 돌아왔더니 얼굴이 시뻘게진 친구가 달려와 이제 두발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다며 신이나 있었다. 뒤에서 잡아 주신 선생님에 기대어 운동장을 서너 바퀴 돌았는데 이제 혼자 두발 자전거를 타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음 달에는 이 친구와도 자전거를 타고 마을로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농부들을 분주하게 다그쳤던 봄 바람이 잦아들고 물이 가득 담긴 논에 모들이 심겨져 있을 들판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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