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 수많은 사람들로 붐벼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다는 의미로 ‘단속사’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이곳 절터엔 이제 석탑 두 기만 덩그러니 서 있다.

‘중이 어떻게 유교를 논하나’
불·유·도-3교의 가르침 정리한
<삼가귀감> 목판본 파괴
‘괴기스럽다’ 사천왕상 불태워
절터엔 석탑 두기만 덩그러니


동부 지리산의 관문, 경남 산청군 신안면 원지에서 경호강을 건너면 단성면으로 들어서게 된다. 지리산 천왕봉 아래 중산리에 이르는 국도 20호선 ‘지리산 가는 길’을 이곳에서는 ‘지리산대로’로 명명해 놓았다.

경호강을 가로지르는 단성교에서 도로를 따라 5km 남짓 진행하면 ‘남사예담촌’이 나온다. 오래된 돌담길과 고택, 그리고 회화나무 풍경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그런데 이곳 마을 뒤 언덕에는 뜻밖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흔적이 서려있는 ‘역사의 현장’이 있다. 바로 ‘이사재’라는 곳이다. 이순신 장군이 경남 합천에 있던 권율장군의 도원수부로 백의종군하는 길에 하룻밤을 묵고 간 곳으로, 박호원이라는 사대부의 머슴이 살던 곳이다. 난중일기에는 이날 밤새도록 퍼붓는 비에, 불편한 방에서 겨우 밤을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백의종군길에 나선지 두 달여, 몸서리치는 고문과 모친의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자괴감과 회한이, 퍼붓는 비와 더불어 온통 그 비좁은 공간에 뒤엉켜 있었음을 짐작해 본다.

남사예담촌을 지나 지리산 방향으로 잠시 진행하면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직진 방향 지리산 가는 길을 버리고 오른쪽 청계·입석 쪽으로 향한다. 마치 가로수처럼 도열해 있는 감나무와 가을걷이에 분주한 시골 풍경과 함께 7km 정도 달리면 ‘단속사지’가 나온다. 산골마을 한가운데 석탑 두 기가 덩그러니 서있는 황량한 풍경을 지닌 곳이다. 한때 수많은 사람들로 붐벼,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다며 단속사(斷俗寺) 라는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지만, 이제 절집은 사라지고 세상 사람들에게 집터로 내어준 지가 오래되었다.

1568년 당시 이곳 단속사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청허당 서산대사가 편찬한 ‘삼가귀감’ 목판이 파괴되고, 이 절의 사천왕상이 불태워지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삼가귀감’은 서산대사가 ‘유불도(儒佛道)’가 이루려 하는 것은 다르지 않다’라는 취지로 불교(선가귀감), 도교(도가귀감), 유교(유가귀감)의 좋은 내용들을 정리하여 합본한 것인데, 이 책을 출판하기 위해 판각해 놓은 목판을 진주 유생 성여신과 그 일행이 깨부수고, 또 절집의 사천왕상 모습이 괴기스럽다며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1549년(명종4) 승과에 급제하고, 선교양종판사라는 벼슬로 서울 봉은사에 머물던 서산대사는 자신이 해나갈 본연의 일은 수행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어린 나이에 출가하였던 지리산 자락 하동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수행을 하면서 후학들의 공부를 위해 삼가귀감을 편찬한 것이었다. 그런데 성여신이 목판을 깨부순 이유가 참으로 황당하다. 삼가귀감에 유가의 글을 맨 마지막에 두었기에 그러했다는 것이다. 물론 중(僧)이 감히 어떻게 유교를 논하느냐는 비아냥과 함께. 이때 서산대사의 세속 나이는 49세, 성여신은 23세 되던 때였다.

그리고 이 사건의 전말을 전해들은 성여신의 스승 남명 조식 선생은 ‘공자께서 언행이 대범한 사람을 취한 까닭(광간 狂簡)’ 운운하며, 다소 과격하긴 했다하면서도 은근히 성여신의 행동을 두둔한다. 모르긴 해도 남명선생과 서로 공경하며 교류해오던 서산대사는 사건의 당사자로 혈기왕성한 20대의 성여신보다, 남명의 태도에서 더욱 서운함 혹은 무력감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남명은 서산대사의 제자인 사명대사에게도 시를 써서 주고, 문집에 글을 남기고 있을 정도로 종교를 떠나 서로 교류해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 사건 이후 서산대사의 행적은 지리산에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고, 훗날 묘향산에서 큰스님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어떠한 인연인지 더욱 놀라운 것은 서산대사의 속가명이 ‘최여신’으로, 성여신과 같은 ‘여신汝信’이었다는 것이다.

조용섭/‘지리산권 마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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