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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섭의 지리산이야기 <26>광한루원에서 만나는 지리산] 귀양 온 황희 정승 독서·풍광 즐기던 곳

[한국농어민신문]

▲ 방장정(方丈亭), 전북 남원 광한루원의 호수에는 조선 중기 송강 정철이 조성했다는 세 개의 인공섬이 있다. 이곳에는 신선들이 산다는 봉래, 방장, 영주의 삼신산을 두었는데, 그 서쪽에 지리산을 의미하는 방장산이 있다. '방장정'이라는 정자는 1964년에 세워졌다. 뒷편에 보이는 건물은 호수 건너 편에 있는 광한루이다.

훈민정음 창제 참여한 정인지
주변 경관 감탄, 도교사상 심고
정철은 세 개의 인공섬 지어   


요즘 지리산의 고장 남원시에서 제작되는 각종 포스터, 현수막, 안내책자 등에  ‘광한루 600주년’이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광한루(보물 제281호)는 정유재란기에 왜군의 방화에 불타버리고, 1626년(인조4) 남원부사 신감에 의해 다시 지어지긴 하였지만, 창건 600년, 중건 393년의 오래된 역사를 지닌 누정(樓亭)이다. 이러한 유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 광한루에는 수많은 역사인물들의 이야기가 서리게 되었고, 또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광한루가 있는 정원인 광한루원(명승 제33호)에 지리산이 있다는 것도 그러한 ‘광한루의 인문학’이 지니고 있는 상징적 콘텐츠이다. 

광한루의 역사는 1419년(세종원년) 방촌 황희(1363~1452)가 남원으로 귀양을 왔을 때, 독서하며 이곳의 풍광을 감상하기 위해 초막을 짓고 광통루(廣通樓)라 하였다는 데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세종 임금대의 명재상으로 이름을 높였던 황희 정승이 무슨 죄를 지어 남원으로 유배를 오게 되었을까? 바로 태종 이방원의 장자인 양녕대군의 폐세자와 충녕대군(훗날 세종)의 세자책봉이라는 우리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과 연루되어 있다. 당시 태종은 지신사(비서실장)로 둘 정도로 중용하였던 황희가 양녕대군의 폐세자를 극력 반대하자 파직시키고 경기도 파주로 귀양을 보낸다. 그러다가 유배지가 한양과 너무 가까우니 멀리 보내야한다는 상소가 있자, 다시 남원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한다. 황희의 조상들이 살았던 남원에서 모친을 모시고 살 수 있게 하였으니, 측근들에 대한 피의 숙청을 서슴지 않던 태종이 황희라는 인물을 얼마나 아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사실은 남원 유배 만 3년 만에 상왕 태종의 건의를 받은 세종이 자신의 세자책봉을  반대한 황희를 좌참찬으로 발탁하며 조정으로 복귀시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한말 우국지사인 황현은 그의 매천집에 ‘황희의 할아버지인 황균비가 남원에 살았고, 그의 묘소는 남원의 서쪽 30리쯤에 있는 풍산에 있다‘라는 내용 등으로 황희의 조상이 남원에 살게 된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황희가 지었다는 광통루는 1444년(세종 26)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당대의 지식인 정인지(1396~1478)가 삼도순찰사로 전라도에 와서 남원에 들렀을 때, 비로소 도교사상이 서린 공간으로의 정체성을 지니게 된다. 정인지는 광통루 주변 경관의 빼어남을 보고, ‘달나라의 옥황상제가 있는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가 바로 이곳이 아니던가’라고 감탄하며 광한루로 고쳐 부르게 하였던 것이다. 이런 사실로 보아 당시 조정의 풍수 관련 최고책임자로 풍수에 조예가 깊었던 정인지가 풍수와 연결고리가 있는 도교사상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광한루는 조선중기 시가문학의 대가인 송강 정철(1536~1593)에 의해 본격적으로 신선들의 세상으로 공간 조성을 더하게 된다. 요천의 물길을 끌어와 광한루 앞에 호수를 만들고는 은하수라 하고, 오작교를 놓아 목동 견우와 옥황상제의 딸 직녀의 사랑이야기를 불어넣었던 이곳에 정철은 세 개의 인공섬을 짓는다. 그리고는 세 섬을 신선들이 사는 ‘삼신산(三神山)’이라 하는데, 바로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을 말한다.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금강산(봉래산), 지리산(방장산), 한라산(영주산)을 삼신산으로 일컬어왔는데, 바로 방장산이 지리산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산청 대원사의 일주문 편액이 ‘방장산 대원사’로 되어 있는 등, 지리산 곳곳에 방장산이라는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하동 쌍계사의 일주문 편액이 삼신산으로 되어있고, 금당 영역의 영주당, 방장실, 봉래당이라는 전각 이름에서도 그러한 의미를 확인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철이 삼신산을 조성한 지 380여년이 지난 1960년대에 이르면 이곳의 사람들은 ‘신선들의 세상 광한루원’이라는 스토리텔링 작업의 정점을 찍는다. 소(牛)시장이었던 땅을 사들여 넓고 아름다운 정원으로 꾸미더니, 남쪽으로 정문을 내고는 옛사람들도 생각지 않았을 ‘청허부’라는 현판을 걸고, 지리산을 의미하는 방장섬에는 방장정이라는 정자도 세운다. 어디 그뿐인가, ‘완월정’이라는 인간계의 누각을 지어 달나라를 감상한다고 하였으니 말이다. 약 50여 년 전 광한루원 공간조성에 보여준 지역문화의 저력에 박수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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