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 세진대와 마적송. 경남 함양군 휴천면 용유담 인근에 있다. ‘마적도사 전설탐방로’나, ‘지리산 둘레길 금계-동강 구간’에서 만날 수 있다. 벼랑을 이루는 바위 위에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반석이 있고, 바위 앞에는 수령 400년이 넘은 소나무가 신령스런 모습으로 서있다. 마을사람들은 이 소나무를 ‘마적송’이라고 부른다. 반석에는 구한말 이곳에 살았던 강지주라는 선비가 새긴 ‘세진대’ 등 바위글씨가 있다.

마적도사 전설 따라 조성된
‘용유담~마적동’ 탐방로 걸으면
우뚝 솟은 ‘400년 소나무’ 등 반겨


폭염에 이어 가을장마 운운하며 8월 중순을 호들갑스럽게 지나던 날씨는 처서를 지나면서 바람의 온도를 한결 내려놓았다. 순식간에 변해가는 계절의 흐름에 찐한 아쉬움이 느껴지는 그런 시절이다. 8월의 마지막 일요일, ‘마적도사 전설탐방로’를 걷기 위해 경남 함양 휴천면의 용유담을 찾았다. 여기서 ‘마적도사 전설’은 대략 이러하다. 

“옛날 마적도사가 종이에 쇠도장을 찍어서 나귀에게 부쳐 보내면, 나귀가 어디로인지 가서 식료품과 생활필수품을 등에 싣고 왔고, 나귀가 용유담 가에 와서 울면 마적도사가 쇠막대기로 다리를 놓아 건너오게 하였다. 하루는 나귀가 짐을 싣고 돌아와서 울었는데, 마침 용유담에 있던 용 아홉 마리가 서로 싸우는  시끄러운 소리에 마적도사가 나귀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였고, 힘을 다해 울부짖던 나귀는 그대로 지쳐 죽었다. 화가 난 마적도사는 용유담의 용들을 쫓아버렸다.

이런 전설을 중심으로 용유담에서 마적동을 둘러오는 ‘마적도사 전설탐방로’를 조성해 놓았다. ‘마적동’이라는 지명의 유래에는 다음의 두 가지가 있다. ‘신라 무열왕 때 마적대사가 이곳에 절집을 짓고 수도를 할 때 마을이 생겨 마적동이 되었다’라는 이야기와, 또 ‘마을 앞 큰 바위 위에 말발굽 형상이 있어 마을이름이 지어졌다’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동(洞)’은 깊은 골짜기를 이루는 곳을 의미한다. 

‘마적도사 전설탐방로’는 용유담에서 지리산둘레길 이정표를 따라 모전마을로 향하면서 시작된다. 마을 정자 있는 곳에서 오른쪽 고양터 방향으로 들어서며  좁고 오래된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른다. 약 2km 정도 오르면 송대마을에 닿는다. 이곳에서는 ‘말 귀바위’ 앞을 지나 임도를 만나는데, 마적동으로 길이 이어진다. 지리산 북부 함양군 휴천면의 깊숙한 산자락을 에도는 이 길에서는, 산줄기가 ‘부처의 누워있는 형상(와불臥佛)’을 이루는 모습과, 거대한 바위가 반석을 이루는 세진대(洗塵臺)라는 예사롭지 않은  풍경들을 만날 수 있다.

송대마을에서 마적동으로 향하다가 숲을 벗어날 즈음 뒤를 돌아보면, 오른쪽 산줄기에 부처님 두상(머리) 형태를 띤 봉우리가 보인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부처님을 본다’는 뜻의 ‘견불(見佛)’이라는 이름이 오래전부터 전해지고 있다. 거대한 바위들이 모여 두상의 형태를 이루는 이곳을 ‘상내봉’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안내판에는 ‘와불산’이라는 낯선 이름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엄천강변 60번도로(천왕봉로)에도 와불 조망터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머리 부분인 상내봉에서 발끝을 이루는 함양독바위(노장대)까지 이어지는 완전한 와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상내봉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두상 모습의 봉우리를 와불산으로 바꾸어 부른다니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와불 조망터를 지나 임도를 계속 따르면 ‘말발굽바위와 마적대’ 안내판을 만난다. 마적대는 임도에서 약 400m 위의 산삼농원(신농산삼약초원) 안에 있다. 안내판에 농장주의 안내를 받아 갈 수 있다며 연락처가 적혀있다. 마적대 입구에서 잠시 걸으면 독가촌을 지나고, 이내 마적사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마적동에 닿는다. 현재 대종교 천진전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잠시 내려서면 세진대(洗塵臺) 안내판과 이정표가 보인다. ‘먼지와 때를 씻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곳에는 벼랑을 이루는 거대한 바위 위에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넓고 평평한 반석이 있고, 바위 앞에 수령 400년이 넘은 거대한 소나무(마적송)가 신령스런 모습으로 서있다.

반석에는 세진대 등, 구한말 이곳에 살았던 강지주(姜趾周 1856~1909)라는 선비가 새긴 글씨가 있다. 그는 또 ‘세진대기(洗塵臺記)’를 남겨 이곳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데, ‘만약 이름 있는 사람이 이 바위를 만났다면, 돌의 족보(石譜)에 나오는 어떤 유명한 바위와도 견줄 수 있었을 것’이라며, 세진대의 빼어난 풍광을 예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뜻을 같아하는 사람들과 계(契)를 조직하고 이곳에서 심신단련과 친목을 도모하였다고 하는데, ‘세진대기’ 말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며 그이의 바람을 전하고 있다.

‘여러 군자들을 따라 노닐면서 뱃속의 먼지와 때를 말끔히 씻어내고, 의리에 흠뻑 젖어 다시는 더러움에 물들거나 세속에 휩쓸리는 상태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란다’.(이재구님 번역문 인용) 세진대에서 약 600m 정도 내려서면 지리산 둘레길을 만나고, 용유담이 지척에 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한국농어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