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리산 연곡사 동승탑과 탑비. 뒷편 산자락으로 오르면 북승탑이 나온다.

왜란·의병활동·전쟁 겪어낸
통일신라시대 석조미술 '극치'
대적광전 뒤 산자락에 우뚝


피아골을 에워싸고 있는 1월 하순의 지리산 자락은 소리마저도 얼어붙은 듯 적막하다. 생존을 위해 처절하고도 치열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산사람(빨치산)들의 비장감이 느껴지는 바로 그 ‘엄숙한 계절’이다. 무술년을 맞이하며 지리산이야기는 전남 구례군으로 접어들었다. 구례군 토지면 연곡사 가는 길 오른쪽으로 길게 드리워진 산줄기는 황장산능선이다. 경남 하동과 전남 구례를 가르는 이 산줄기는 고도를 높이다가 당재(堂峙)에서 ‘불무장등능선’이라는 이름으로 주능선의 삼도봉으로 이어진다. 연곡사는 이 불무장등 산자락이 피아골로 내려서는 끝자락에 있다. 구례 화엄사와 마찬가지로 6세기 중반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이 절집은 ‘눈부심’의 문화재와 ‘눈물겨움’의 역사를 지닌 곳이다. 

연곡사 일주문을 들어서면, 몇 년 전만해도 정면 대적광전에 이르기까지 훤히 트여있던 공간에 천왕문, 삼홍문 등 새로운 건축물이 들어서 있고, 곳곳에 적지 않은 규모의 중창불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연곡사는 임진·정유년의 왜란과 구한말 의병활동, 6.25전쟁을 전후한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대부분의 전각이 불타버리는 시련을 겪었다. 현대에 들어 절이 폐사되는 운명에까지 처해진 것은 빨치산의 지리산 입산과 토벌대의 활동 때문이다. 절이 들어서 있는 피아골이 빨치산의 지리산 입산 초기 본거지였으니 말이다.  

대적광전 뒤 산자락을 오르면 ‘동승탑’(국보 제53호)과 ‘북승탑(국보 제54호)’을 차례로 만날 수 있다. 그동안 익숙했던 ‘부도’라는 이름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승탑은 스님들이 입적하였을 때, 화장을 하고 수습한 사리를 모셔놓는 탑을 말한다. 이 동승탑은 어느 스님을 모셨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석조미술의 극치를 보여준다는 동승탑이 그 험난한 시절을 겪으면서도 전혀 파손되지 않고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연곡사의 승탑을 바라볼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천 년 전 옛사람들의 돌 다루는 솜씨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아름다운 승탑을 조각하던 석공이 기리던 이는 누구였을까? 어떤 신심이 이런 승탑을 새길 수 있게 하였을까? 

연곡사 뒤 피아골을 품고 있는 불무장등 산자락에는 폐사된 암자 터가 많이 있다. 1686년 초여름부터 가을까지 약 넉달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암자들을 순례하듯 옮기며 독서에 열중하던 우담 정시한은 매일의 기록을 ‘산중일기’로 남겼다. 우담은 함양 삼정산 아래 도솔암을 출발해 반야봉을 오른 뒤 하동 칠불암으로 하산하여 하룻밤을 머문다. 그리고는 다음날 당재를 넘어 구례쪽의 불무장등 산자락 ‘금강대암’을 들어서며 다음과 같이 기록을 남긴다.

‘칠불사에서 고개 하나를 넘어, 20리 가량을 걸어 도착했다. 동향으로 산을 뒤에 지고 있다.’ 
또 ‘금강대암’에서 머물다가 아래에 있던 ‘길상대암’으로 거처를 옮기고는, 그곳에서 사방을 둘러보며 이렇게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연곡사 조계문이 내려다보인다.’

위의 두 암자는 물론, 그가 머물렀던 이곳의 모든 산중암자는 터만 남기고 사라지고 없다. 그런데 위 두 문장을 짜맞추어보면 어떠한가? 칠불암-당재-금강대암-길상대암-연곡사로 이어지는 점과 선을 이룰 수 있지 않은가. 이렇듯 우담의 산중일기에는 다녀간 곳의 거리와 주변 풍경이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어 17세기후반 지리산 절집을 복원하는데 중요한 사료가 된다. 하지만 현재 이곳의 산자락에 들어가기란 쉽지 않다(비법정탐방로). 언젠가 산길이 열려 ‘연곡사와 폐사암터 순례‘라는 멋진 문화답사프로그램이 다가올 날을 기대해본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 산중암자에 들어와 스님들과 생활하면서, 당시 지리산자락의 모습을 생생하게 남긴 우담선생에게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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