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남 하동군 화개면 의신마을 뒤 산자락에 숨은 듯 들어서 있는 원통암.

유불선 삼교의 대통합 이끈
청허당 서산대사의 출가지
폐사된 절터 찾아 20년 전 복원


갑작스런 한파가 찾아온 12월 중순 어느 날, 경남 하동군 화개면의 의신마을을 찾았다. 온전히 지리산 산자락에 둘러싸인 이곳은 산길이 부챗살처럼 열리는 곳으로, 지리산 등반의 베이스캠프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금방 내려서는 겨울 오후 햇살을 붙잡기 위해, 마을 뒤 산자락에 숨은 듯 들어서 있는 ‘원통암’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의신마을 입구에서 세석(남부능선)으로 가는 등산로를 따르지 않고 계속 직진해서 전봇대가 이정표 역할을 하는 호젓한 산길로 들어선다.

산자락에는 작은 계곡 사이로 손바닥 크기라 해도 좋을 좁은 묵정밭들이 군데군데 들어서 있다. 작은 돌로 축대를 쌓아 일구어 놓은 밭은 언뜻 보아도 그 노동의 강도가 느껴진다. 드문드문 두릅나무 밭을 지나서 마을에서 1km 남짓 산길을 오르면, 가파른 돌계단 위로 ‘서산선문(西山禪門)’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문이 보인다. ‘원통암’이다. 이 산중암자는 조계종의 법맥을 이은 조선중기의 고승이자 임진왜란의 의승장으로 잘 알려진 ‘청허당 서산대사’가 출가를 한 곳이다.

스님은 15세 되던 해에 과거에 낙방한 뒤, 친구들과 함께 전국을 유람하다가 이곳에서 숭인장로를 만나 불교와 연을 맺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지리산 자락에서 정진하던 대사는 30세 때(명종4년)에 부활된 승과에 급제하고, 37세에 ‘선교양종판사’라는 최고의 승직에 이른 뒤, 당시 조선불교 선종의 대표 절집이던 봉은사 주지에 보임된다. 하지만 대사는 이내 조정에서 내린 벼슬을 그만두고 지리산으로 돌아와 산승(山僧)의 삶을 살게 된다. 이때 머문 곳이 신흥사(현 왕성분교)의 산내암자인 내은적암으로 지금은 절터만 남아있다. 대사는 이 시기에 지리산 화개골 여러 산중암자와 토굴에서 정진하였고, 불교의 가르침을 요약한 ‘선가귀감’과 유교와 도가의 가르침을 모은 ‘삼가귀감’을 편찬하였다고 전해진다. 서산대사의 흔적은 쌍계사, 칠불암, 불일암 등 인근의 사암(寺庵)에서 남긴 많은 기록에서 만날 수 있다. 이러한 서산대사의 발자취를 기리기 위해 하동군에서는 예전 의신마을 사람들이 신흥으로 오고가던 ‘신흥-의신 옛길’을 ‘서산대사길’로 조성해 놓았다.

오랫동안 폐사지로 남아있던 원통암은 칠불암을 중건하신 통광스님(2013년 9월 6일 입적)의 뜻을 받들어, 상좌이던 동림스님(1951~2007)이 1997년에 7월에 인법당과 산신각을 복원하였고, 2011년 11월에 서산대사의 영정을 모신 ‘청허당’과 ‘서산선문’ 등이 새로 조성되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다’라는 가르침으로 원융의 사상을 설파하며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고, 나아가 유불선(儒彿禪) 삼교의 가르침도 다르지 않다는 통섭의 사상을 세상 밖으로 외친 청허당 서산대사의 담대함은 어디서 나왔을까? 대사의 이러한 사상과 실천에 힘입어 조선불교는 숭유억불의 그 절망적인 암흑기를 견뎌낼 수 있었을 것이다.

괜스레 절집마당을 어슬렁거리며 인기척을 내어보지만, 되돌아오는 것은 풍경과 바람 소리, 그리고 길게 드리워지는 땅거미의 움직임뿐이다. 젊은 스님이 계실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올라왔지만, 차가운 겨울바람 탓을 하며 기어이 법당 문을 열지 않고 절집을 나선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도 청허당 같이 원융과 통섭을 실천하는 영웅이 나타나게 되길 간절히 빌어본다. 원통암 계곡에 흐르는 작은 물길이 뜻밖에도 큰 하늘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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