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락국의 마지막 왕, 구형왕의 돌무덤. 구형황은 ‘나라를 잃은 죄인이니 돌로 무덤을 만들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신라에 항복, 잊혀진 이름 가락국
후손들은 삼국의 격전지 누비며
삼국통일 주역으로 최고 자리까지


아침저녁으로 대기가 서늘해졌다. 지리산 자락 함양에서 산청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이야기도 이제 물길을 건너 산자락 아래로 걸음을 옮긴다.

경남 함양군 유림면 삼거리에서 엄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면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이다. 이곳에서 직진방향 ‘동의보감로’를 따라 약 1km 정도 진행하면 덕양전(德讓殿)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700여m 산자락으로 들어서면 돌무덤 형태의 구형왕릉을 만나게 된다. 지리산 자락 가야사(가락국, 금관가야)의 숨결이 짙게 서려있는 공간이다.

이 돌무덤의 주인공은 가락국(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제10대)인 구형왕으로 알려져 있다. 구형왕은 신라에 항복하여 나라를 물려주었다고 해서 양왕(讓王)이라고도 불리는 인물이다.

짧아지는 햇살에 산그늘이 길게 드리워진 초가을날 오후, 마지막 넘어가는 햇살을 비스듬히 받고 있는 무덤과 주변 산자락은 깊은 적막감에 싸여 있다. ‘역사 속으로 걸어 나오라’는 공허한 외침에 관심 없다는 듯, 오래된 검회색 돌무덤이 주는 무심한 느낌도 여전하다. 많은 기록과 전승되는 이야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傳구형왕릉’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역사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움 때문이리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다소 다른 내용이긴 하지만,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구형왕이 ‘자진해서 신라에 나라를 바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신라 법흥왕에 맞서 싸우려했으나, 군사력의 차이가 너무 커서 전쟁을 포기하고 항복을 하였다는 것이다. ‘나라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기지 못할 전쟁에서 백성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도 국왕의 도리’라 생각하고, 가야의 백성을 노예로 삼지 않고, 양민으로서 신라백성으로 받아주기로 합의한 후 항복하였다는 것이다. 그러자 법흥왕은 가야의 왕에게 금관국(김해지역)을 식읍으로 주고, 가야 왕족에게는 진골로 편입해서 귀족 대우를 해주고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구형왕은 식읍을 다스리는 일을 사양하고 지리산으로 들어와 살다가 5년 후에 세상을 뜨는데, ‘나라를 잃은 죄인이니 돌로 무덤을 만들어 달라’는 유언을 남겨 이렇듯 돌무덤으로 모셔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후, 구형왕의 후손인 가야 왕족들의 삶은 어떠했는가? 아들 김무력과 손자 김서현, 그리고 증손자 김유신으로 이어지는 그의 핏줄들은 그 혼란하던 삼국의 격전지를 누비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결국 몰락한 금관가야의 왕족으로, 변방지역에서 소외되고 배척받던 ‘편입 진골’이라는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게 되는 것이다. 살아 있을 때 ‘태대각간’이라는 최고의 관직을 지낸 김유신은 죽어서는 ‘흥무대왕’으로 추존까지 되고, 삼국통일의 주역인 신라 문무왕이 구형왕의 5대 외손이 되는 사실은 나라와 가문의 흥망사에 있어 흥미롭기까지 하다.
구형왕릉 가는 길 입구에 있는 ‘덕양전’은 구형왕과 그의 부인 계화왕후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봄과 가을 향례를 올리는 곳이다. 그리고 이웃 함양 오도재의 산신각, 그 아래에 있는 빈대궐터, 마천면 지리산 칠선계곡 입구의 ‘두지터’, ‘성안마을’, ‘국골’ 모두 가락국 이야기와 이어지는 곳들이다. 산청과 함양을 잇는 지리산 자락 ‘가야 이야기’가 하루 빨리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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