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부전 불화 속 ‘태극기 그림’ 눈길

[한국농어민신문] 

남원 선원사 명부전 지장시왕도에 그려진 태극기. 이 불화는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조성되었는데, 태극기는 이 불화의 왼쪽(바라보는 방향) 중앙에 있는 십대왕 중 6대왕인 변성대왕 관모(모자)에 그려져 있다.
남원 선원사 명부전 지장시왕도에 그려진 태극기. 이 불화는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조성되었는데, 태극기는 이 불화의 왼쪽(바라보는 방향) 중앙에 있는 십대왕 중 6대왕인 변성대왕 관모(모자)에 그려져 있다.

지난해 말, 남원 선원사는 국립무형유산원에서 주관한 남원무형문화유산 콘테스트에 ‘남원 선원사 괘불재’로 참여하여 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다. 비록 큰 규모의 공모전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잊혀있던 선원사 괘불의 존재를 알리는 의미 있는 행사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괘불은 사찰 건물 내부에서 진행할 수 없을 정도의 큰 규모의 불교의식이나 야외에서 개최해야 할 성격을 지닌 의례 때, 건물 외부에 걸리는 대형 불화를 말한다. 선원사 괘불은 아미타불이 중앙에 위치하고 좌우 협시보살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그려져 있는 ‘아미타불괘불도’로, 크기는 세로 9m, 가로 6m에 이른다.

선원사 괘불은 1695년(乙亥) 남원부사 김세평이 선원사를 중창할 당시 조성되었으며, 기우제·천도제 등 남원지역의 대규모 의례가 있을 때 모셔졌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서 확인되는데, 백과사전 등에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선원사가 소장 중인 괘불의 화기(畵記. 불화의 제작 내력을 적은 글)에 의하면, 이 괘불은 17세기 말에 조성된 괘불이 낡고 훼손이 심하여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일제강점기인 1942년 5월 남원군수를 비롯한 지역민들의 보시로 새롭게 제작된 것이다.

남원지역에는 오랜 전통으로 이어지는 선원사와 ‘남원기로회’와의 관계가 눈에 띈다. 남원기로회는 조선중기 이후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남원부의 퇴임 향리들이 지역사회 발전과 전통문화의 유지계승을 위해 결성한 단체인데, 남원기로회가 선원사의 유지 및 지원을 위한 불공계를 조직하여 각종 불사에 참여하여 온 것이다. 특히 많은 대중이 참여하는 요천(蓼川. 광한루원 앞에 흐르는 강)의 괘불기우제, 선원사 철불제례 등의 대형 행사를 주도하여온 것이 여러 기록에서 확인된다. 이는 ‘남원의 비보사찰 선원사’라는 지역사회의 인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남원지역에서 열렸던 큰 규모의 의식행사에는 선원사 괘불을 모신 의례가 오랫동안 전승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최근 선원사에서는 괘불재의 전통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해왔는데, 이러한 노력은 ‘남원 선원사 괘불재’가 2023년 조계종 중앙종단의 ‘산사문화제’ 공모에 선정되는 결실을 맺었다. 21세기에 들어서는 처음으로 거행될 선원사 괘불재는 금년 9월 초에 열릴 예정이라고 한다.

한편 3·1절을 앞둔 지난 2월 하순, 남원 선원사에서는 일제강점기 때인 1917년에 조성된 명부전 불화에서 태극기 그림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전국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다.

지장보살을 본존으로 모신 전각인 명부전에 있는 이 불화는 지장보살상 뒤 벽에 걸려있는 ‘지장시왕도’를 말하는데, 이 그림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사후에 죽은 자의 죄업을 심판하는 10명의 왕들이 그려져 있다. 태극기 그림은 이 시왕도의 지장보살 오른쪽(바라보았을 때 왼쪽) 중앙부분 왼쪽에 있는 6대왕 ‘변성대왕’의 관모(모자)에 그려져 있다. 그림의 크기는 어른 손바닥 정도이다.

이에 대해 선원사 운문스님은 ‘칼산으로 된 도산지옥을 관장하는 변성대왕의 관모에 태극기를 그려 놓은 것은 총칼로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일제가 결국 총칼로 망할 것’이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태극기 전문연구자의 의견에 따르면 이 태극기의 문양은 1910년대 이후 사용된 독립운동 시기의 것과 같은 것인데, 일제의 태극기 말살 정책에 맞서 독립을 바라는 불교계의 염원을 담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시왕도의 화기에 선원사 주지 기선(채수용)스님이 당시 화엄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대강백 진응혜찬(1873∼1941)스님을 증명법사로 초빙하여 제작하였다는 사실이 확인되며 또한 학계로부터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진응 스님은 일제강점기 초인 1911년, 만해 한용운 스님 등과 함께 주도적으로 임제종 운동을 벌여, 일본 조동종과 한국불교의 통합을 저지하는데 앞장선 인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원사 시왕도의 태극기 그림은 한용운 스님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진응 스님의 항일의식이 반영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렇듯 선원사에는 오랫동안 전승되어온 지역문화의 전통과, 일제에 대항하던 역사의 흔적이 두 근대문화재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모쪼록 역사적 사실로 선명하게 서려있는 선원사의 전통과 문화가 지역의 소중한 유무형자산으로 거듭나게 되길 기대해 본다.

협동조합 지리산권 마실/조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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