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 초월한 수행자의 삶에 침잠

[한국농어민신문] 

남원 심경암 전경. 주불전에는 대웅전(북쪽), 극락보전(동쪽)의 현판이 걸려있다. 최근 들어 주지 혜산스님에 의해 크게 중창되었다. 서산대사는 심경암에 머물면서 ‘심경암 용담에 있다’라는 시를 남겼다. 현재 심경암이 있는 곳이 옛 용담리 지역이던 신촌동이다. 고려시대 석불좌상(전북유형문화재 46)이 발견되어 고려시대 사찰로 추정되는데, 경내에는 오래전 석탑재 등이 있다.
남원 심경암 전경. 주불전에는 대웅전(북쪽), 극락보전(동쪽)의 현판이 걸려있다. 최근 들어 주지 혜산스님에 의해 크게 중창되었다. 서산대사는 심경암에 머물면서 ‘심경암 용담에 있다’라는 시를 남겼다. 현재 심경암이 있는 곳이 옛 용담리 지역이던 신촌동이다. 고려시대 석불좌상(전북유형문화재 46)이 발견되어 고려시대 사찰로 추정되는데, 경내에는 오래전 석탑재 등이 있다.

서산대사는 15세에 지리산 원통암에서 불문(佛門)에 든 후, 50세쯤(1570년 전후)에 지리산을 떠나 묘향산으로 주석처를 옮긴 것으로 여러 기록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대사의 행적은 자서전 형식으로 쓴 ‘완산 노부윤에게 올린 글’(上完山蘆府尹書)에 잘 드러나 있다. 여기서 완산은 전주의 옛 지명이고, 노부윤은 1568년부터 1570년까지 전주부윤으로 재임했던 옥계 노진(1518~1578)을 말한다. 따라서 이 글은 서산대사가 지리산을 떠날 즈음에 썼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1980년대에 발표된 ‘서산대사의 시문학’이라는 논문에서는 노부윤을 소재 노수신(1515~1590)으로 단정하였고, 지금도 인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분명 오류이다. 노수신은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대사의 동문인 부휴선수, 제자인 사명유정 등과도 깊은 교류를 한 사실은 있지만, 전주부윤을 지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호에서 언급했듯 ‘완산 노부윤에게 올린 글’은 대사가 50세 이전에 주로 하동의 지리산 자락 절집에 머물면서 수행했던 행적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서산대사의 문집인 ‘청허당집’에는 지리산권역의 여러 지역과 관련된 기사들도 실려 있다.

대사는 남원에도 자주 왕래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23세 때에 ‘봉성(구례)을 지나 용성(남원)으로 벗을 찾아가다가, 한낮의 닭소리를 듣고 깨우침을 얻었다’는 기록과 더불어, ‘남원에 사는 김악사’, ‘심경암(心鏡庵)’, ‘요천을 지나며’ ‘풍암에서 묵으며’ 등의 시에서 그 동선의 흔적이 발견된다.

특히 심경암이라는 절집에 머물며 지은 시에는 ‘용담(龍潭)’이라는 지명을 명확하게 부기하고 있어 그 위치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고려시대 사찰로 추정되는 심경암이 현대에 이르러 중창불사가 이루어진 곳이 바로 옛 용담지역인 신촌동에 있기 때문이다.

단속사 삼가귀감 훼손사건으로 대사에게 처참한 심경을 안겨주었을 산청(당시 진주)에서의 기록은 잘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 ‘남명 처사(南溟處士)에게 올린 글’ 중, ‘강가의 정자에서 한번 헤어진 뒤로’라는 표현에서 남명 조식이 머물렀던 덕산을 방문하여, 덕천강변의 세심정에서 만났을 풍경을 떠올려볼 수 있다.

함양과 관련된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것도 의외이다. 서산대사의 법조(法祖)인 벽송지엄이 창건했고, 스승인 부용영관이 수행하며 머물렀던 벽송사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만 ‘천왕령에 올라(登天王嶺)’라는 시에서 하동에서 주능선을 넘어 함양으로 넘나들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1만 골짜기 냇물 소리 곳곳마다 들리고, 기암인지 고목인지 분간하기 어려워라. 동쪽으로 내일 함양의 길에 들어서서, 머리 돌려 바라보면 두류는 흰 구름 속이리라.’ 

서산대사는 청장년 시절을 지리산에서 보낸 승려답게 화개동, 청학동 등의 골짜기와 천왕봉, 반야봉 등 주봉의 이름이 담긴 시문을 많이 남겼다. 반야봉은 지난 호에서 소개한 ‘지리산 황령암기’에서 뚜렷하게 그 존재감이 확인된다. 그런데 대사가 4월과 8월(음력) 천왕봉을 등정한 후 지은 ‘등천왕봉(登天王峯)’의 시 두 수에는 비장한 마음이 느껴진다.

4월에 시에서는 ‘천왕봉은 하늘과 가까워 고조가 되고, 1천 산은 땅에 줄지어 자손이 되었어라. 앉아서 보니 흰 해가 눈 밑에서 솟아나고, 붉은 노을과 푸른 바다가 서로 삼키고 토하누나.(중략) 가소롭구나 지팡이 가로 맨 나그네여, 티끌세상 돌아보니 시끄럽기가 불더미 같네.’라며 정상을 등정하여 아래를 내려다본 소회를 적었다.    

8월에 올라 지은 시 마지막 두 구절에는 세속을 떠나 수행하는 대사의 오롯한 마음이 읽혀진다.

‘만국(萬國)은 바글바글 마치 개미집, 마구 뒤섞여 완전한 것이 없도다. 남가(南柯)의 커다란 꿈속에서 누가 꿈을 깬 대장부일까.’

‘남가의 커다란 꿈속’은 꿈에서 만난 개미집 속의 삶을 이야기한 것으로, 인생의 부귀영화가 모두 덧없는 한바탕 꿈속의 세계를 의미하는 말이라고 한다. 공자가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은 것을 알게 되었듯(登泰山小天下), 서산대사는 지리산 천왕봉에 오르며 이렇듯 세속을 초월한 수행자로서의 삶에 더욱 침잠하며 마음을 다졌을 것이다. 이상으로 ‘서산대사와 지리산’ 이야기를 마친다. 위의 시 번역문은 동국역경원에서 제공하는 ‘청허집’을 인용하였다.

조용섭/협동조합 지리산권 마실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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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섭의 지리산이야기 <56> 등구사登龜寺 이야기② [한국농어민신문] 1489년(성종20) 4월 14일(음력), 탁영 김일손(1464~1498)은 함양 읍내를 출발하여 14박 15일에 걸친 지리산 유람 대장정에 나섰다. 몇 년 동안 그가 마음에 두고 있던 이 유람에는 함양 출신의 도학자인 일두 정여창(1450~1504)도 동행하였다. “14일(임인일). 드디어 천령(함양)의 남쪽 성곽 문에서 출발하였다. 서쪽으로 10리 쯤 가서 시내 하나를 건너 객사에 이르렀는데, 제한蹄閑이라고 하였다. 제한에서 서남쪽으로 가서 산등성이를 10리 쯤 오르내렸다. 양쪽으로 산이 마주하고 있고 그 가운데 한줄기 샘이 흐르는 곳이 있었는데, 점점 들어갈수록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몇 리를 가서 한 고개를 올랐다. 하인(從者)이 말하기를, ‘말에서 내려 절을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누구에게 절을 하느냐고 묻자 그가 답하기를, ‘천왕天王입니다.’라고 하였다. (중략) 이 날 비가 퍼붓듯이 내렸고 안개가 온 산을 휘감고 있었다. 말에 몸을 맡겨(信馬) 등구사에 이르렀다. 솟아 오른 산의 형상이 거북과 같은데, 절이 그 등에 올라앉아 있는 것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략) 절집 위 동서쪽으로 두 건물이 있었다. 일행은 모두 동쪽 건물에 묵기로 하고 하인들을 가려서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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