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신행 중심사찰 역할 이어와

남원 선원사 전경. 오래전부터 남원의 비보사찰로 창건되었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남원 선원사 전경. 오래전부터 남원의 비보사찰로 창건되었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지리산의 서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남원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지금의 시세(市勢)와는 달리 규모가 큰 고을이었음이 여러 기록에서 확인된다. 특히 남원 출신으로 조선전기 관료이자 경세가로 이름 높았던 눌재 양성지(1415~1482)는 그가 공조판서로 재임 중이던 1477년(성종 8), 다음과 같은 글을 성종 임금에게 올리며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1만 가구가 되는 읍(邑)이 여섯 군데 있는데, 경주와 평양이 제일 크고, 나주와 남원이 다음이며, 전주와 진주가 그다음입니다.”[성종실록]


당시 남원부성을 축성하는 일을 추진 중이었는데, 다시 짓는 성터의 면적이 너무 좁으니, 큰 고을 규모에 맞게 더 넓혀야 한다고 건의하는 글의 서두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렇듯 큰 도회지였던 남원에는 오래전부터 남원부성의 동서 양쪽 3리(里) 즈음에 선원사와 만복사라는 큰 사찰이 있었다. 한양이나 개성, 경주 등 옛 수도였던 지역을 제외한 지방의 도시로는 다소 이례적인 사실로 보인다.

더군다나 이 두 절집의 ‘만복귀승(탁발을 마치고 만복사로 돌아가는 승려)’, ‘선원모종(선원사의 저녁 종소리)’이라는 아름다운 풍경이 ‘남원 8경’, ‘남원 10경’ 등에 이름 올려 진 것으로 보아, 이 두 절집이 지역민들의 삶에 매우 가깝게 다가가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렇듯 남원의 사찰들이 지역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 이유에 대해서는 18세기 중반에 발간된 『용성지』에서 그 내력을 대강 유추해볼 수 있다. 참고로 용성(龍城)은 남원의 또 다른 이름이다.


“세상에 전해오기로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중략) 이 부(府)의 지리(地利)를 진압하기 위해서, 이 사찰에는 불상을 조성하고 탑을 세워야 하며, (중략) 선원과 파근에는 사찰을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용성지』, 「불우」, ‘만복사’]


위의 글은 지형·지세의 풍수지리적 결점을 인위적인 방법으로 보완하는 도선국사의 ‘비보풍수사상’을 언급한 내용이다. 이렇듯 만복사, 선원사, 파근사 등 남원지역의 여러 사찰들은 남원의 지세를 비보하여, 지역의 안녕과 번영을 도모하기 위해 창건되었다는 유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특히 선원사는 ‘도선국사가 주산(主山)인 백공산의 지세가 객산(客山)인 교룡산에 비해 너무 허약한 것을 알고, 남원의 지세를 돋우기 위해 ‘진압사찰(鎭壓寺刹)’로 세웠다’라는 내용으로 창건유래가 더욱 구체화되어, 오랫동안 지역사회에 전승되고 있다.

남원부 읍내에 있던 만복사와 선원사는 정유재란 남원성전투(1597년 8월) 때에 모두 불타버리는데, 그 후 약 100년이 지난 17세기 중후반 숙종 대에 이르러서야 폐허로 방치되어 있던 이 두 절집의 중창불사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만복사는 18세기 초반 무신란(이인좌의 난·1728년)을 전후한 시기에 발생한 ‘만복사 괘서사건’ 이후에는 기록에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18세기 중후반에 폐사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선원사는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남원지역사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남원의 불교신행 중심사찰로서 역할을 해온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남원부의 퇴직 향리들의 계(契)조직인 ‘남원 기로소’와 선원사의 특수한 관계가 눈에 띈다.

남원 기로소의 규칙에는 선원사의 유지 및 대규모 불사(佛事) 등에 대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여 왔음이 확인된다. 선원사 괘불을 모신 요천 변의 기우제나 천도재 등의 큰 행사를 기로소에서 주도하였고, 이러한 전통이 오늘날 남원의 불교무형문화유산으로 전승될 수 있는 토대가 된 것이다.

최근 선원사 관련 자료들을 정리하다가 백과사전류나 남원시 누리집 등의 선원사 설명에 몇 가지 오류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우선 정유재란 남원성전투 후 선원사의 중창불사가 이루어진 시기이다. 『용성지』 선원사 편에는 ‘부사 김세평이 을해(乙亥)년간에 중창하여 승려를 토착케 하고, 규약을 만들어서 지키면서 살게 하였다’라고 나와 있다. 즉 을해년인 1695년(숙종21)에 선원사를 중창하였다는 것인데, 1694년 김세평이 남원수령으로 부임한 사실을 여러 사료에서 찾을 수 있어, 이는 명확하게 확인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백과사전과 ‘남원시 누리집’ 등에는 한결같이 1갑자, 즉 60년이 뒤로 밀린 ‘1755년(乙亥, 영조31) 부사 김세평이 선원사를 중창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오류는 한국불교사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퇴경 권상로(1879~1965)가 『한국사찰전서』를 편찬할 때, 남원부사 김세평의 부임연도를 영조30년으로 착각하면서 생긴 일 때문임이 확인되었다. 

현재 각종 문헌이나 연구논문에도 이 오류내용이 그대로 인용되고 있는데, 모쪼록 빠른 시일 내에 수정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음 호에 계속-

조용섭/협동조합 지리산권 마실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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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섭의 지리산이야기 <56> 등구사登龜寺 이야기② [한국농어민신문] 1489년(성종20) 4월 14일(음력), 탁영 김일손(1464~1498)은 함양 읍내를 출발하여 14박 15일에 걸친 지리산 유람 대장정에 나섰다. 몇 년 동안 그가 마음에 두고 있던 이 유람에는 함양 출신의 도학자인 일두 정여창(1450~1504)도 동행하였다. “14일(임인일). 드디어 천령(함양)의 남쪽 성곽 문에서 출발하였다. 서쪽으로 10리 쯤 가서 시내 하나를 건너 객사에 이르렀는데, 제한蹄閑이라고 하였다. 제한에서 서남쪽으로 가서 산등성이를 10리 쯤 오르내렸다. 양쪽으로 산이 마주하고 있고 그 가운데 한줄기 샘이 흐르는 곳이 있었는데, 점점 들어갈수록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몇 리를 가서 한 고개를 올랐다. 하인(從者)이 말하기를, ‘말에서 내려 절을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누구에게 절을 하느냐고 묻자 그가 답하기를, ‘천왕天王입니다.’라고 하였다. (중략) 이 날 비가 퍼붓듯이 내렸고 안개가 온 산을 휘감고 있었다. 말에 몸을 맡겨(信馬) 등구사에 이르렀다. 솟아 오른 산의 형상이 거북과 같은데, 절이 그 등에 올라앉아 있는 것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략) 절집 위 동서쪽으로 두 건물이 있었다. 일행은 모두 동쪽 건물에 묵기로 하고 하인들을 가려서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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