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한 거북이, 하늘 오르는 모습한 곳

[한국농어민신문] 

등구사登龜寺 구한선원龜閑禪院
등구사登龜寺 구한선원龜閑禪院

등구사는 함양군 오도재와 삼봉산을 잇는 산줄기 상의 오도봉(1038.5m) 남쪽 산자락에 있다. 이 절집은 오랫동안 폐사상태로 있었는데, 현 주지인 인담스님이 2006년도에 무너진 절터에 토굴을 지어 머물기 시작했고, 그 후 지속적인 불사가 이루어지며 반듯한 가람의 모습을 갖추어가고 있다. 등구사가 역사 속에 드러나며 이렇듯 복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은 『경상도함양군지리산등구사사적』(이하 등구사사적)이라는 기록이 발견되며, 시공간에 걸쳐있는 퍼즐이 조금씩 맞추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벽송사에서 소장하고 있던 이 책은 현재 해인사성보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등구사사적』의 내용 첫머리가 ‘안국사로부터 전해진다’라는 의미의 전우안국(傳宇安國)으로 되어 있듯이 인근에 있는 안국사의 역사와도 깊은 연관이 있는 이 기록은, 1716년 월화탄천이라는 스님이 등구사를 중창한 탄기 등 여러 승려들의 요청으로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기록을 쓴 법호가 월화月華이고, 법명이 탄천坦天이라는 승려의 행적은 전혀 알 수 없다.

그런데 마치 이 사적기가 세상에 드러날 때를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오래 전 모아 놓은 자료 속에서 이 이름이 불쑥 튀어나왔다. 서산대사(청허휴정1520~1604)는 사명대사를 비롯한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했는데, 청매인오, 정관일선, 소요태능, 중관해안, 편양언기 등이 그들이다. 월화탄천은 법맥 상으로 이들 중 중관해안(1567~미상)의 법을 이은 증손이 된다. 법맥은 승려들의 족보라 할 수 있는데, 중관해안의 법맥은 능허청간-형곡복환으로 이어지며, 월화탄천이 그 다음 대代를 잇는다.

이러한 내용은 조선후기 영조 대에 사암채영이라는 승려가 지은 『서역중화해동불조원류』에서 확인된다. 이 책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인도와 중국을 거쳐 고려-조선시대에 이르는 선종계열 승려들의 법맥을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월화탄천의 증조인 중관해안은 화엄사와 금산사 등 대가람의 사적기를 지었고, 스승인 형곡복환은 군자사사적기를 남겼다. 이렇듯 중관해안 문중의 승려들은 사적기 찬술에 일가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군자사사적기는 현재 전해지지 않으나, 1783년 사근역 찰방을 지내던 이덕무가 군자사를 방문하여 절집에 있던 군자사 사적기를 옮겨 적은 내용이 그의 문집에 남아있다.  

『등구사사적』에는 등구사의 창건유래, 중창에 이르는 과정, 그리고 책 말미에 18세기 전반에 있었던 4차례의 등구사 불사에 시주한 승려들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해 등구사의 변천과정을 정리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행호대사가 지리산에 와서 머물 곳을 찾으며 오도재(峙) 남쪽을 바라보다가, 산자락이 남쪽으로 뻗어 엎드린 형세가 마치 신령한 거북이가 팔괘를 등에 지고 하늘로 오르는 것 같은 곳에 절집을 짓고, 등구사라 하였다. 때는 신라 태종 무열왕 즉위 2년인 656년이었다. 그리고 이듬해(657년)에는 고개 너머에 또 절을 지었는데, 나라 안의 전쟁이 그치고 사람이 편안해져서, 안국安國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후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시기에 등구사에 불이 나 빈터로 남아 있었다. 1708년 안국사가 화재로 불타버리자, 절을 다시 짓는 것보다 평평한 곳에 있는 등구사 터에 새로 절집을 짓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모아져 등구사를 중창하였다.’

등구사의 창건유래는 역사적으로 고증할만한 사료는 없으나, 현재 이 절집에 있는 삼층석탑이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조성되었을 것이라는 문화재 조사보고로 보아, 오랜 창건역사를 지닌 것은 확실해 보인다. 다만 신라시대에 등구사를 창건했다는 행호라는 승려는 확인되지 않으며, 조선전기 안국사에 머물렀던 고승 행호조사의 이름을 가탁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그런데 사적기에는 비어있는 조선전기 등구사의 모습이 촉망받던 27세의 청년 성리학자 탁영 김일손에 의해 드러나는가 하면, 오랫동안 책 속에 글씨로만 누워있던 중창불사 시주승들의 이름이 조선후기의 성리학자 정시한과 고승 석실명안에 의해 역사인물로 깨어나고 있다. 훗날 누군가 이러한 절집의 유래를 알아봐주길 바란다는 기록자의 바람처럼, 이제 막 기지개를 켜고 있는 책 속의 인물들이 벌떡 일어나서 역사 앞으로 걸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음 호에 이어짐)

조용섭/협동조합 지리산권 마실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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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섭의 지리산이야기 <56> 등구사登龜寺 이야기② [한국농어민신문] 1489년(성종20) 4월 14일(음력), 탁영 김일손(1464~1498)은 함양 읍내를 출발하여 14박 15일에 걸친 지리산 유람 대장정에 나섰다. 몇 년 동안 그가 마음에 두고 있던 이 유람에는 함양 출신의 도학자인 일두 정여창(1450~1504)도 동행하였다. “14일(임인일). 드디어 천령(함양)의 남쪽 성곽 문에서 출발하였다. 서쪽으로 10리 쯤 가서 시내 하나를 건너 객사에 이르렀는데, 제한蹄閑이라고 하였다. 제한에서 서남쪽으로 가서 산등성이를 10리 쯤 오르내렸다. 양쪽으로 산이 마주하고 있고 그 가운데 한줄기 샘이 흐르는 곳이 있었는데, 점점 들어갈수록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몇 리를 가서 한 고개를 올랐다. 하인(從者)이 말하기를, ‘말에서 내려 절을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누구에게 절을 하느냐고 묻자 그가 답하기를, ‘천왕天王입니다.’라고 하였다. (중략) 이 날 비가 퍼붓듯이 내렸고 안개가 온 산을 휘감고 있었다. 말에 몸을 맡겨(信馬) 등구사에 이르렀다. 솟아 오른 산의 형상이 거북과 같은데, 절이 그 등에 올라앉아 있는 것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략) 절집 위 동서쪽으로 두 건물이 있었다. 일행은 모두 동쪽 건물에 묵기로 하고 하인들을 가려서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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