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계곡 사이, 절묘하게 자리 잡아

[한국농어민신문] 

지리산 덕산사(경남 산청) 입구 장당골을 가로지르는 ‘반야교’와 다리 아래 너른 반석에 새겨진 ‘명옹대’ 각석
지리산 덕산사(경남 산청) 입구 장당골을 가로지르는 ‘반야교’와 다리 아래 너른 반석에 새겨진 ‘명옹대’ 각석

1487년 가을, 지리산 유람에 나선 추강 남효온(1454~1492)은 진주 여사등촌을 출발하여 단속사에 들른 뒤, 저물녘에 덕산사에 들어와 하룻밤을 머문다. 오늘날의 지명으로 볼 때, 산청군 단성면 남사마을-단속사-백운동-시천면 덕산-삼장면 대포리로 이어지는 동선(動線)이다. 이 날 덕산사로 들어오면서 추강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날이 저물어 덕산사에 이르렀다. 이 절은 두 냇물이 합류하는 언덕에 있고, 대나무가 두루 펼쳐져 있다. 그 왼쪽에 있는 냇물은 고였다가 다시 흐르는데 용연이라 하고, 오른쪽에 있는 폭포는 떨어졌다가 소용돌이를 이루는데 부연이라 한다. 그 깊이는 한량이 없다.”(남효온/「지리산 일과」)

위의 글에서 추강이 묘사하고 있는 절집 양쪽을 흐르는 두 물길은 내원골과 장당골을 말하는데, 두 계곡 사이에 절묘하게 자리 잡고 있는 덕산사의 풍경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변함이 없다. 16~17세기에는 남명 조식과 그의 문인들의 강학, 또는 독서한 곳으로도 자주 덕산사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564년 여름, 남명 조식을 비롯한 각재 하항, 덕계 오건 등 당대의 지식인들의 회합이 덕산사에서 이루어졌고, 진주 유생 성여신(1546~1632)도 1567년 지리산 유람에 나서며 덕산사에 들렀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덕산사는 17세기 즈음 화재로 폐사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가, 1959년에 들어서야 중창불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추강이 묘사했듯 공간적으로 분명한 풍경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절집은 60여 년 동안 내원사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왔다. 그러던 중 2020년 10월 대웅전의 위치 고증을 위한 시굴 조사에서 덕산사라는 사찰명이 새겨진 기와 파편이 발견되어, 이를 근거로 2021년 3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원래 이름인 덕산사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현재 덕산사에 대한 산청군의 안내나 백과사전의 설명에는 ‘1609년(광해군 1년)에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고 수백 년 동안 절터만 남아 있었다’라고 폐사 시기를 밝히고 있다. 그런데 몇몇 문헌기록으로 볼 때 폐사 시기는 17세기 중후반으로 수정함이 옳을 듯하다. 조선후기 지리산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고승 석실명안(1646~1710)이 출가한 곳이 바로 덕산사이고, 1656년에 편찬된 인문지리서인 『동국여지지』에도 ‘덕산사, 지리산 동쪽에 있다(德山寺。在智異山東)’라는 내용이 명확하게 확인되기 때문이다.

석실명안은 12세이던 1657년에 지리산 덕산사의 성각장로를 스승으로 불문에 든 뒤, 당대의 고승인 백암성총의 법맥을 이은 인물로, 함양 안국사, 구례 연곡사, 하동 쌍계사와 칠불암 등 지리산권 전역에서 수행하며 머물렀던 흔적이 보인다. 만년에는 삼장사, 대원사, 왕산사 등의 지리산 동부권역에서 주석하다가 왕산사에서 입적하였다. 특히 33세이던 1678년에는 스승인 백암성총의 명으로 덕산사 인근에 있었던 불장암에서 머물며 후학들을 지도하였다는 내용이 행적에서 확인된다. 또한 그의 문집인 『백우수필』에 제자들의 이름이 삼장문인, 쌍계문인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석실명안의 문도들이 지리산 동부권역의 사암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경북 인동(仁同) 출신인 남계 신명구(1666~1742)는 1717년에 지리산 자락 덕천동으로 옮겨와 약 10년간 살았는데, 이때 지리산을 유람한 기록 두 편을 남겼다. 그 중 「유두류일록」은 1719년 5월, 지금의 산청군 시천면 덕산을 출발하여 내대리를 거쳐 무위암에 이른 뒤,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황금능선 상의 내원점이라는 곳에서 하산하며 불장암, 덕산사 옛터를 거쳐 덕산으로 원점회귀하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현재 덕산사 오른쪽(서쪽. 절집을 바라볼 때 왼쪽)의 내원마을과 이어지는 길의 노정임을 알 수 있다. 이때 남계가 무위암에서 반갑게 만나는 태휘라는 승려는 바로 석실명안의 법맥을 이은 제자로, 여러 기록에 그 이름이 올려져있다. 남계는 내원점에서 내려서서 불장암에서 하룻밤을 머문 뒤 덕산사로 내려서는데, 이 두 절집은 2리 정도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고 전한다. 남계와 석실문중과는 가깝게 교류를 한 것으로 보인다. 남계는 석실명안의 제자인 단숙이라는 젊은 승려의 요청으로, ‘서설암유고후(書雪遺稿後)’라는 짧지 않은 글을 지어 석실명안의 문집 『백우수필』에 남기고 있다. 설암은 석실명안의 또 다른 호(號)이다.  

덕산사 동쪽를 에워싸고 흐르는 장당골을 건너는 반야교 아래에는 너른 반석에 새겨진 ’명옹대(明翁臺)‘ 각자(刻字)가 눈에 띈다. 명옹은 ‘명암 늙은이’라는 의미로 바로 명암정식(1683~1746)이 60세이던 1742년에 새긴 글이다. 명암은 청나라에 패한 명나라의 문화를 그리며 살았고, 주희의 ‘무이구곡’처럼 덕산 무이산(구곡산)에 무이정사를 짓고 구곡을 경영하려 한 인물이다.

조용섭/협동조합 지리산권 마실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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