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찾아보란 듯 은밀한 곳에 새겨진 글씨들

[한국농어민신문] 

용호구곡 제1곡 송력동 인근 소나무 숲과 돌담. 각자(刻字)는 정면 다리를 지나 왼쪽 계곡 쪽으로 내려서면 만날 수 있다.
용호구곡 제1곡 송력동 인근 소나무 숲과 돌담. 각자(刻字)는 정면 다리를 지나 왼쪽 계곡 쪽으로 내려서면 만날 수 있다.

지리산 남원의 구룡계곡은 오래전부터 원천 혹은 용호, 용추동으로 불리어온 것이 여러 기록에서 확인된다. ‘아홉 마리 용이 살다가 승천했다’라는 전설에서 유래한 현재의 이름은 20세기 초반에 들어서며 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중반에 발간된 남원 향토지 『용성지』의 ‘산천(山川)’조에는 남원의 산, 하천, 숲 등에 대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오늘날의 구룡계곡을 일컫는 ‘용추동(龍湫洞)’이라는 골짜기를 소개하고 있다.


“용추동 : 원천방의 지리산 가운데 있는데, 열두 개의 추(湫)가 있다. 첫째로 불영추(佛影湫)요, 둘째로 구룡추이다. 구룡추 위에는 옥녀봉이 있고,...(하략)’


이렇게 아홉 곳의 추(못)에 대한 풍경을 소개하고는 글 말미에 ‘나머지 3개의 추는 이름이 없다’라며 끝을 맺고 있다. 『난중잡록』의 저자로 정유재란 때에 의병장으로 활동한 조경남(1570~1641) 선생은 늦은 나이인 1624년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 이곳 용추동으로 들어와 별장을 짓고 유유자적하며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용호(龍湖)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구한말의 우국지사 송병선(1836~1905)은 1879년 지리산 유람에 나서며 이곳을 들르는데, 이때 ‘길을 돌아 용호동으로 들어서니 계곡이 매우 깊고 그윽하였다.’라는 글을 그의 「두류산기」에 남기고 있다. 비슷한 시기 의병장으로 활동한 기우만(1846~1916) 역시 회인현감을 지낸 김장원의 묘갈명에 ‘용성(남원) 동쪽에 원천방이 있는데, 골짜기는 용호라고 한다’라며 같은 이름을 쓰고 있다.

그리고 이곳(주천면 호경리) 출신으로, 평생 남원에 거주하며 학문수양과 후학양성에 매진했던 난사 김삼문(1889~1973)은 1940년에 용호구곡을 탐방하고, 9곡 이름의 의미, 위치, 풍경 등의 내용을 담은 「용호구곡경승안내」라는 글을 남겼다. 용호구곡은 조선후기 성리학자들에 의해 유행했던 주자(주희)의 ‘무이구곡’에서 연원하였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며 이렇듯 풍경과 스토리가 주를 이루는 멋진 글이 전해지게 된 것이다.

4년 전 수달래 피는 봄날, 본 지면의 ‘소릿길 이야기’로 소개했던 구룡계곡을, 이번에는 가을 끝자락의 날에 김삼만 선생의 「용호구곡경승안내」를 탐방 지침서로 삼아 용호구곡 곳곳에 새겨져 있는 글자를 찾는 테마로 만났다. 용호구곡 각자는 큰 비로 유실되었다는 ‘3곡 학서암’ 말고는, 나머지 여덟 곳에 마치 ‘날 찾아봐라!’ 하듯 은밀한 곳에 새겨져 있다. 아름다운 풍경과 더불어 각자(刻字)를 찾는 재미가 쏠쏠한 답사가 될 것이다.

제1곡은 ‘송력동’으로 이른바 ‘송림약천’이라 부르던 곳이다. 이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구룡계곡 주차장에서 오른쪽 골짜기로 들어서는 것이 좋다. 호젓한 길을 따르면, 소나무 숲에 골짜기의 음기를 막기 위해 세웠다는 돌담을 만난다. 정면 다리를 건너 길을 잠시 따르다가 계곡으로 내려서면, 오른쪽의 바위에 새겨져 있는 글씨를 만난다.

제2곡 옥룡추는 용호정 아래에 있는 큰 못(沼), 즉 용소를 말하는데, 각자는 용소 옆 용호정 방향 언덕 바위에 있다. 제1곡에서 탐방로를 따라 언덕으로 올라 용호정을 만난 뒤, 이곳에서 계곡으로 내려서서, 큰 바위 아래 검푸른 소를 이루는 용소로 접근하면 된다. 이제 육모정 앞의 도로 쪽으로 올라 구룡계곡 탐방안내소로 향한다. 안내소 앞에는 ‘정령치로’를 잇는 다리가 있는데 바로 ‘삼곡교’이다.

제3곡 학서암은 삼곡교 하류 쪽 모퉁이에 있다. 「용호구곡경승안내」에는 ‘백 명이 앉을만한 반석과 만 섬 물길이 회류하는 맑은 연못’이라는 풍경으로 묘사하고 있다. 각자는 큰 비에 유실된 지 오래되었고 진입하기도 마땅찮아, 먼발치에서 눈가늠하고 계곡으로 내려선다.

제4곡 서암은 ‘스님이 꿇어 앉아 독경하는 모습’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나, 「용호구곡경승안내」에는 그런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챙이소’, ‘구시소’ 등의 멋진 계곡 풍경을 이루는 곳에 안내판이 서있다. 하지만 안내 그림처럼 각자를 계곡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챙이소 부근에서 물길을 건너 계곡 하류 쪽으로 잠시 내려서서, 왼쪽 산자락을 더듬듯 찾으면 바위에 새겨진 글씨를 겨우 만난다. 이곳 탐방로 인근에는 단풍나무숲이 멋진 풍경을 이루는 칠성암 옛터가 있다. -다음 호에 계속

조용섭/협동조합 지리산권 마실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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