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손된 채 넘어진 승탑엔 ‘혜암당’ 새겨져

[한국농어민신문]

‘이번에 서국익(徐國益)이 서울에서 어버이를 뵈러 남원으로 왔다가 나에게 쌍계사를 함께 유람하자고 청했다. 이 유람은 평소 내가 마음에 두고 있던 터라, 고을 동쪽 원천원(元川院)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중략) 용추(龍湫)를 거쳐 대흥사에서 묵고, 거세게 흘러내리는 폭포를 구경하였다. 감로사를 거쳐 화엄사에 이르러 웅대한 불당을 구경하였다.’


위의 글은 담허재 김지백(1623~1671)이 1655년 10월 8일부터 11일까지 3박 4일간 지리산을 유람하고 쓴 「유두류산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기서 대흥사는 파근사의 옛 이름이고(혹은 파근사 인근에 있었던 절집이라고도 한다), 감로사는 지금의 천은사를 말하며 당시에는 남원부 관내에 있었다.

담허재가 쌍계사 유람을 나서며 일행들과 만난 원천원(元川院)은 예전부터 남원과 구례·하동을 잇는 주요 교통로 상 숙박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지금의 남원시 주천면 외평마을에 있었다. 옛사람들은 이곳에서 구례로 갈 때, 주로 숙성치를 넘어서 산동(山洞)으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담허재 일행은 이 길을 택하지 않고, 구룡계곡 하류에 있는 용추를 거쳐 약 6km 정도 거리에 있었던 파근사로 올랐던 것이다. 이곳에서는 만복대와 영제봉 사이에 있는 고개 ‘다름재’를 거쳐 산동으로 이동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담허재가 파근사를 지나간 후 31년 뒤인 1686년 8월, 이 절집의 이름은 중창불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실상사에서 만나게 된다. 우담 정시한(1625~1707)은 ‘법당의 후불탱화를 증명할 파근사의 승려 영휴가 와서 만났다’라는 기록을 마치 지문처럼 그의 『산중일기』에 남기고 있는 것이다. 실상사 극락전 뒤 언덕에 있는 ‘용담대화상탑’은 그러한 두 절집의 밀접한 관계를 증명하는 유물이다. 남원 출신으로 속성이 김 씨인 용담조관선사(1700-1762)는 청허휴정-편양언기의 법맥을 잇는 고승으로 상월새봉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제자인 혜암윤장에게 법을 전했다. 선승이자 대강백으로 지리산 영원암, 벽송사, 대암암, 화엄사 등에서 강학을 펼쳤다고 한다. 용담선사의 행장을 지은 혜암윤장은 감로사를 중창하였고, 역시 강백으로 이름 높았는데, 화엄사에서 강석을 펼칠 때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였다고 한다. 용담선사 입적 후 6년 후에 편찬된 『용담집』 행장(行狀)과 후록(後錄)의 내용을 보자.


‘문인(門人)들이 5재를 지내는 밤에 사리 5과를 수습하였으니, 바로 꿈에 감응한 일이었다. 이를 나눠 세 곳에 탑을 세웠으니, 즉 삭발한 곳인 감로사와 오랫동안 노닐던 곳인 파근사와 입적한 곳인 실상사였다.’[행장-용담집/동국역경원]

‘감로사와 파근사와 실상사 세 곳에 모두 위답(位畓)을 설치하여 그 사원(寺員)에게 2년 터울을 두고 제사를 시행하도록 하였다. 1767년에 감로사에서 먼저 행하였고, 1768년 파근사가 다음 차례이고, 1769년에는 실상사가 또 그 다음 차례이다’[후록-용담집/동국역경원]


이렇듯 용담대사에 의하여 세 절집이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용담대사의 승탑은 실상사와 천은사에는 있으나, 파근사 옛 절터에는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혜암윤장의 것으로 보이는 ‘혜암당’이라는 글이 새겨진 승탑이 부러진 채 절터에 남아 있어 그 인연의 끈을 잇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파근사는 어떤 이유로, 어느 때에 폐사가 되었는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1871년 편찬된 호남읍지 남원 편 사찰조에는 보이나, 1889년에 편찬된 전라북도각군읍지에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19세기 말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파근사 옛 절터를 가기 위해서는 남원 육모정에서 정령치로를 따라 올라 고기리 내기마을회관(경로당) 아래에 있는 ‘비지정문화재 승탑재’ 안내판을 따르면 된다. ‘파근사지’까지는 2.1km로 길이 아주 잘 나있으며 1시간 정도면 닿을 수 있다. 절터에 들어서면 비교적 넓은 공간에 승탑재, 석등, 맷돌, 돌확, 석축, 와편 등이 곳곳에 보이며, 절집이 있었던 흔적이 확연히 드러난다. 절터에서 진행방향(남쪽)으로 계속 향하면 만복대와 영제봉 사이 산줄기로 이어진다. 담허재 일행이 쌍계사로 가기 위해 산동으로 이동하던 그 길이었을 것이다. 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1월 하순의 날, 폐허가 된 파근사 옛 절터에서 선명하게 서려있는 옛사람들의 흔적을 읽는다. /협동조합 지리산권 마실 이사장

관련기사

조용섭의 지리산이야기 <56> 등구사登龜寺 이야기② [한국농어민신문] 1489년(성종20) 4월 14일(음력), 탁영 김일손(1464~1498)은 함양 읍내를 출발하여 14박 15일에 걸친 지리산 유람 대장정에 나섰다. 몇 년 동안 그가 마음에 두고 있던 이 유람에는 함양 출신의 도학자인 일두 정여창(1450~1504)도 동행하였다. “14일(임인일). 드디어 천령(함양)의 남쪽 성곽 문에서 출발하였다. 서쪽으로 10리 쯤 가서 시내 하나를 건너 객사에 이르렀는데, 제한蹄閑이라고 하였다. 제한에서 서남쪽으로 가서 산등성이를 10리 쯤 오르내렸다. 양쪽으로 산이 마주하고 있고 그 가운데 한줄기 샘이 흐르는 곳이 있었는데, 점점 들어갈수록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몇 리를 가서 한 고개를 올랐다. 하인(從者)이 말하기를, ‘말에서 내려 절을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누구에게 절을 하느냐고 묻자 그가 답하기를, ‘천왕天王입니다.’라고 하였다. (중략) 이 날 비가 퍼붓듯이 내렸고 안개가 온 산을 휘감고 있었다. 말에 몸을 맡겨(信馬) 등구사에 이르렀다. 솟아 오른 산의 형상이 거북과 같은데, 절이 그 등에 올라앉아 있는 것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략) 절집 위 동서쪽으로 두 건물이 있었다. 일행은 모두 동쪽 건물에 묵기로 하고 하인들을 가려서 돌려보냈다.”
저작권자 © 한국농어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