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사상 서려있는 지리산 으뜸 절집

[한국농어민신문] 

금대암에서 바라본 지리산 주능선. 왼쪽 상단에 하봉-중봉-천왕봉-제석봉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 오른쪽에 있는 키 큰 전나무는 절집 마당 아래 대나무 숲에 서있다. 수령이 500여년 되었다고 한다. 정면 가까이 보이는 봉우리는 창암산이다. 

지리산 북쪽 산자락의 경남 함양군 마천면에서 전북 남원시 산내면 쪽으로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오른쪽 산자락 길 입구에 세워진 ‘지리방장제일금대(智異方丈第一金臺)’라는 표지석을 만날 수 있다. 방장은 지리산의 다른 이름이니 짐작컨대 금대암이 지리산에서 으뜸가는 절집이라는 뜻으로 새겨놓은 듯하다. 정확히 말하면 금대암은 큰 하천(임천)을 사이에 두고 지리산과 마주하고 있는 금대산(851.5m) 자락에 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옛사람들은 금대산도 지리산에 속한 산으로 보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대부분의 인문지리서에도 인근의 안국사와 더불어 금대암을 지리산의 절집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금대, 즉 ‘황금(金)자리(臺)’라는 뜻의 이름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이에 대해 조선후기의 고승 경암응윤(1743~1804)은 금대암의 내력을 기록한 「금대암기」에 ‘정토경에 염불의 공덕이 높은 자는 목숨을 마칠 때, 서방의 성인이 금대로 와서 맞이함이 으뜸이요, 은대 등은 그 다음이다’라는 내용으로 이름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즉 사람이 죽어 극락으로 갈 때, 염불의 공덕이 높은 수행자에게는 신중(神衆)들이 삼생상품의 구품연화대 중에서 상생품인 금빛 연화대를 가지고 와서 영접하는데, 이를 금대로 일컫는다는 의미이다. 이렇듯 금대암은 그 이름에서 불교의 정토사상이 깊이 서려있는 절집임을 알 수 있다.   

금대암의 창건 시기는 인근에 있는 안국사와 같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등구사의 내력을 기록한 『지리산등구사사적』에는 행호라는 승려가 등구사를 창건한 이듬해인 657년(신라 태종 연간)에 안국사를 지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경암응윤 역시 ‘근거할 만한 사적은 없으나, 신라~고려~조선시대에 이르는 동안 고승 대덕이 머물렀던 곳’이라며, 금대암이 신라시대부터 존재했던 고찰이었을 것이라는 그의 생각을 「금대암기」에 전하고 있다. 

한편 16세기 초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대암·보월암·안국사 모두 지리산에 있다. 본조(本朝) 중 행호가 창건한 것이다’라며, 조선전기에 활동한 천태종의 고승 행호를 창건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고려시대 인물인 이규보가 쓴 ‘진각국사비명’에 ‘진각국사가 금대암에서 수도하였다’라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절집이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는 사실에 전혀 근거가 없어보이지는 않는다. 법명이 혜심인 진각국사(1178~1234)는 스승인 보조지눌에 이어 수선사(송광사) 제2대 사주(社主)를 지낸 인물로,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의 대표적 교과서인 『선문염송』을 편찬한 고승이다. ‘진각국사비명’에 의하면, 국사는 오산과 지리산 등에 은둔하여 수년 동안 자취를 감추고 수행에 전념했는데, 지리산 금대암에 머물고 있을 때는 ‘대(臺) 위에서 연좌하여 눈(雪)이 이마가 묻힐 정도로 쌓였으나, 오히려 우뚝하게 앉아 마치 고목처럼 움직이지 않고 각고의 수행을 하였다’고 전한다. 

이렇듯 고려시대 진각국사의 수행처로 뚜렷한 흔적을 남기고 있는 금대암은 조선전기 고승과 성리학자들에 의해 또 다시 세상에 드러난다. 안국사와 금대암의 중창주로 알려진 행호대사는 조선전기 세종임금의 신임을 얻어 판천태종사로 임명된 천태종의 고승으로, 억불의 기운이 점점 드세어지던 시기에 순교한 인물이다. 그런가하면 김종직을 비롯한 조선전기의 이름난 성리학자들도 금대암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1489년 4월 지리산 유람에 나서 금대암에 들른 김일손(1464~1498)은 당시 이곳에서 펼쳐졌던 범패수행의 역동적인 모습을 그의 「속두류록」에 그려내고 있다.   

“4월 15일, 한걸음에 금대암에 닿았다. 누더기 승복를 입은 승려 20여 명이 가사(袈裟)를 입고서 뒤따르며 범패를 하고 있었는데 그 속도가 매우 빨랐다. 내가 물어보니 이곳은 정진 도량이라고 했다.” 

금대산 자락에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는 금대암은 이렇듯 우리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는 인물들의 흔적과, 치열한 수행 현장으로서의 풍경이 선명하게 서려있는 곳이다. 또한 금대라는 이름은 불교에서 말하는 연화대 외에도, ‘지리산 조망의 으뜸자리’라는 공간적 의미로 불러도 좋을 듯하다. 절집 마당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지리산 주능선의 장쾌한 파노라마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 이름이 지닌 뜻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될 것이다. 절집 마당 아래에는 500여 년의 세월을 견딘 전나무 한 그루가 묵상에 든 수도승처럼 서 있다. 치열한 수행과 바라봄의 환희가 어우러졌을 금대암에서 옛사람들의 흔적과 지리산의 풍경을 읽는다.

조용섭/협동조합 지리산권 마실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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