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깨끗한 ‘촉촉수’ 소리를 느끼다

[한국농어민신문]

선열암 터. 점필재 김종직은 이곳에서 ‘雲根矗矗水冷泠(운근촉촉수영령)’이라는 시구를 남겼는데, ‘우뚝 솟은 바위 촉촉수 소리 맑고도 깨끗하구나’라는 뜻이라고 한다. 여기서 운근(雲根)은 차가운 공기가 바위에 부딪쳐 구름이 생기는 높은 산의 바위를 말하고, 촉촉수(矗矗水)는 바위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표현한 것이다. (번역 : 이영규)

지난 여름, 함양의 조합 동지들로부터 ‘지리산 역사문화조사단’에서 진행 중인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의 「유두류록(遊頭流錄)」 노정 답사에 동참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함양군 관내 지리산의 역사문화콘텐츠를 발굴하고, 향후 인문학 답사프로그램으로 활용하자는 취지라 반가운 마음으로 참여하였다. 「유두류록」은 함양군수로 재임 중이던 점필재가 1472년 8월(음력), 4박 5일간 지리산을 유람하고 남긴 기행문이다. 예문관 수찬으로 있던 점필재는 칠순의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을 청하였는데, 그를 아낀 성종 임금은 외직인 함양군수로 임명하며 배려하였고, 점필재는 1471년부터 1475년까지 함양군수로 재임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점필재 「유두류록」은 후대에 생산되는 지리산 유람록에 자주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지리산 유람 안내서 역할을 톡톡히 하였던 듯하다. 추석 전날인 8월 14일 함양관아를 출발하여 8월 18일 되돌아오는 점필재의 지리산 유람노정을 지금의 지명으로 요약하여 보면 다음과 같은 동선으로 이루어진다.(왕복구간 제외)

적조암(함양군 휴천면 운서리)-함양독바위-쑥밭재-중봉-천왕봉-세석고원-영신봉-백무동-실덕(마천면 강청리)

점필재는 유극기, 조위 등 그의 문인(門人)들과 함께 유람에 나서는데, 해공과 법종이라는 두 승려가 길 안내를 하였고, 다수의 아전과 짐꾼들도 동행하였다.

유람 첫날 점필재 일행은 화암(동강마을)을 거쳐 지장사 갈림길에서 환희대로 올라선 후, 계속 고도를 높이며 선열암, 독녀암, 신열암을 차례로 들른 후 고열암에 이르러 하룻밤을 머문다.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은 거대한 바위 옆에 있던 산중암자이고, 독녀암은 현재 함양독바위, 혹은 노장대로 불리는 거대한 암괴이다. 그런데 위 세 곳의 암자가 『동국여지승람』 ‘불우조’에 그 이름이 올려져있어 흥미롭다. 점필재는 1485년(성종16)에 성종 임금으로부터 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의 수찬 책임자로 임명을 받는데, 아마 이때 이 깊은 지리산 산자락에 있던 세 암자의 이름을 등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폐사된 세 암자 터에는 점필재가 언급한 거대한 바위 인근에 와편 등의 흔적이 남아 있어 그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현재 「유두류록」을 공부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 위치가 모두 확인되었고, 지리산역사문화조사단에서 안내표시를 세워두었다.

이번 지리산역사문화조사단은 적조암에서 함양독바위로 오른 뒤, 점필재가 언급한 미타봉(현재 와불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을 둘러보고, ‘구롱’을 거쳐 ‘청이당 터’까지 답사하였다. 하산은 ‘허공달골’을 내려서며 어름터를 거쳐 광점동에서 완료하였다. 조사단은 함양군 휴천면 운서리에 있는 적조암을 출발하며 답사를 시작하여, 지장사 갈림길-환희대-선열암 터-독녀암(함양독바위)-신열암 터를 거쳐 고열암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었다. 의론대는 고열암 인근에 있다.

선열암 터의 풍광은 특이하다. 바위틈에서 흘러내린 가느다란 물길이 오랜 시간을 쌓으며 작은 못을 이루었고, 지금도 툭툭 물방울을 내려 보내고 있다. 점필재는 선열암 시에서 이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촉촉수矗矗水’라는 단어로 표현하였다고 동행한 이영규 선생이 설명을 해준다. 현재 함양독바위로 잘 알려진 독녀암(獨女巖)에서는 동행한 승려로부터 들은 전설을 소개하며 그 이름을 전하고 있다.

점필재 일행이 하룻밤을 머문 고열암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선다. 그런데 능선 상 갈림길이 있는 상내봉으로 오르지 않고, 급경사를 이루는 사면을 가로질러 벽송사 능선으로 길을 잇는다. 이곳 능선 안부에서는 오른쪽으로 진행하여 거대한 바위군(群)이 있는 봉우리에 올랐다. 바로 점필재가 ‘의론대’에서 바라보았던 ‘미타봉’이다. 현재 함양군에서는 ‘와불산’으로 이름을 바꾸어 놓았다.

정상에서 좁은 바위 통로를 빠져나오자 아래로 석굴이 보이고, 왼쪽으로 올라서니 직벽을 이룬 거대한 바위군과 아슬아슬하게 자리 잡은 너럭바위가 있다. 거대한 암괴가 모인 이곳 봉우리가 산 아래에서 보았을 때 누워있는 부처님의 머리 형상을 이루는 곳이다. 와불의 모습은 이곳에서부터 함양독바위까지 이어진다.   /협동조합 지리산권 마실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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