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동안 방치됐던 ‘구산선문 최초의 가람’

[한국농어민신문]

실상사 입구 ‘해탈교’에서 바라본 지리산의 모습이다. 중앙의 높은 봉우리가 천왕봉이고, 바라보는 방향 왼쪽 산줄기가 중봉-하봉으로 이어지는 동부능선, 오른쪽 산줄기는 제석봉-장터목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이다. 중앙의 낮은 봉우리는 함양군 마천면에 있는 창암산이다. 사진 아래의 하천은 뱀사골, 달궁, 운봉, 아영의 여러 물길이 모여 흐르는 만수천으로, 함양 마천면으로 흐르며 ‘임천’으로 이름이 바뀐다.

12월 하순에 접어들자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졌다.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늘어나는 ‘확진’ 소식에 우리 삶의 주위도 거대한 벽에 갇힌 채 얼어붙은듯하다. 모쪼록 ‘생명의 산’ 지리산이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는 위로와 격려의 공간이 되길 소망하며 희망의 걸음을 걷는다.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있는 실상사는 신라하대인 828년(흥덕왕3) 홍척증각국사에 의해 창건된 구산선문 최초의 가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렇듯 유구한 역사를 지닌 절집인 만큼 실상사에는 승탑과 탑비, 석탑, 석등, 그리고 철불 등의 귀중한 문화재가 남아 옛 역사를 전하고 있다. 하지만 실상사의 전각들은 모두 17세기 후반에 중창불사가 이루어졌고, 그 후로도 거듭되는 중건을 거쳐 오늘날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특히 1882년(고종 19)에는 절터를 가로채기 위한 민간인들의 방화에 의해 전각들이 불타버려 다시 지어졌다고 하니, 평야지대에 위치한 대가람 실상사는 전란과 방화에 의해 절집이 불타버리는 고단한 역사를 반복해서 겪어왔던 것이다.

그런데 16세기~17세기에 지리산을 유람하며 이곳을 다녀간 선비들의 기록에서 이러한 실상사의 역사 속 풍경을 만날 수 있어 흥미롭다. 실상사는 조선 전기 세조(재위기간 1455~1468) 때 큰불이 나서 폐허가 된 후, 무려 200년 동안이나 방치된 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폐사상태에 있던 실상사의 모습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잘 알려진 양대박 장군(1543~1592)이 1586년 지리산 유람을 하고 남긴 「두류산기행록」에 잘 드러난다.


‘절은 폐허가 된 지 1백년이 지나, 무너진 담과 깨진 주춧돌이 가시덤불 속에 묻혀 있고, 철불이 석상(石床) 위에 우뚝 앉아있었다.’


그런가하면 그로부터 정확히 100년 후 성리학자 우담 정시한(1625~1707) 선생은 1686년 4월과 8월 두 차례 실상사를 들르는데, 그의 『산중일기』에 중창불사가 한창이던 당시 실상사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알려주고 있다.


4월 25일 ‘미시(오후 1시~3시)에 실상사에 닿았다.(중략) 법당 화주(化主) 일행(一行)스님과 기와 화주 계오스님도 와서 만났다.(중략) 이 절의 스님들은 지금 마을사람들과 절 땅을 놓고 다툼이 있어 제대로 보존이 어려운 형국이라고 한다. (중략) 법당의 옛날 철불을 보았다. 절의 터로 보아 실로 거찰(巨刹)이다’


8월 22일 ‘향로전에 들어가니 불존승 담익과 화주 일행·계오 스님이 들어와 보았다. 잠시 뒤에 한 스님이 들어오는데 바로 영휴대사였다. 파근사에서 온지 10여 일 되었다는데, 불상 뒤에 조성하는 후불탱화를 증명하기 위해서 왔다고 한다.’


100년 전 절집 마당에 방치된 채 석상(좌대) 위에 덩그러니 앉아있었다고 하였던 철불은 새롭게 지어진 법당(약사전) 안으로 모셔졌고, 승려들이 머무는 향로전 등 일부 건물들의 중건도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불사의 소임을 맡은 ‘법당과 기와 화주’ 스님들이 머물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실상사의 중창불사는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랫동안 폐사상태로 있다 보니 이렇듯 절터의 소유권 다툼 문제가 일어났을 것이다. 100년을 사이에 두고 모습을 달리하고 있는 실상사의 풍경을 ‘양대박과 정시한’이라는 역사인물의 ‘지리산 유람록’에서 확인할 수 있음이 뜻밖이다. 현재 실상사의 유물유적 안내판에는 대체로 ‘정유재란 때에 피해를 입은 후 다시 중건되었다‘라고 되어있다.

또한 불상의 후불탱화 증명법사로 온 영휴대사가 머물던 ‘파근사’라는 절집 이름에 눈길이 간다. 지리산 정령치로 오르는 도로(정령치路) ‘비폭교’에서 오른쪽 산자락으로 오르면 파근사 옛 절터가 있다. 오랫동안 파근사에서 주석하였고, 지리산 영원암을 비롯한 여러 절집에서 강석을 펼쳤던 조선후기의 고승 용담조관대사(1700-1762)는 실상사에서 입적을 하였다. 그 후 대사의 사리를 실상사, 파근사, 감로사(천은사)에 모셨다고 하는데, 이 기록에서도 이 두 절집이 지녔을 연관성이 남달랐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대사의 승탑(용담대화상탑)은 실상사 천왕문을 나와, 오른쪽 약수암 가는 길 약 100m 쯤에 있는 작은 개울을 건너 오른쪽 농로를 따라가면 만날 수 있다.

경자년 한 해 지리산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격려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희망의 신축년 맞이하시길 빈다./협동조합 지리산권 마실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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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섭의 지리산이야기 <56> 등구사登龜寺 이야기② [한국농어민신문] 1489년(성종20) 4월 14일(음력), 탁영 김일손(1464~1498)은 함양 읍내를 출발하여 14박 15일에 걸친 지리산 유람 대장정에 나섰다. 몇 년 동안 그가 마음에 두고 있던 이 유람에는 함양 출신의 도학자인 일두 정여창(1450~1504)도 동행하였다. “14일(임인일). 드디어 천령(함양)의 남쪽 성곽 문에서 출발하였다. 서쪽으로 10리 쯤 가서 시내 하나를 건너 객사에 이르렀는데, 제한蹄閑이라고 하였다. 제한에서 서남쪽으로 가서 산등성이를 10리 쯤 오르내렸다. 양쪽으로 산이 마주하고 있고 그 가운데 한줄기 샘이 흐르는 곳이 있었는데, 점점 들어갈수록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몇 리를 가서 한 고개를 올랐다. 하인(從者)이 말하기를, ‘말에서 내려 절을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누구에게 절을 하느냐고 묻자 그가 답하기를, ‘천왕天王입니다.’라고 하였다. (중략) 이 날 비가 퍼붓듯이 내렸고 안개가 온 산을 휘감고 있었다. 말에 몸을 맡겨(信馬) 등구사에 이르렀다. 솟아 오른 산의 형상이 거북과 같은데, 절이 그 등에 올라앉아 있는 것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략) 절집 위 동서쪽으로 두 건물이 있었다. 일행은 모두 동쪽 건물에 묵기로 하고 하인들을 가려서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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