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규화 선생의 ‘소망탑·반도지’ 잘 보존되길

[한국농어민신문] 

소망탑(素望塔:사진 위)과 반도지(半島池:사진 아래). 약 30년간 불일평전에 머물던 변규화 선생이 조성한 탑군과 연못이다. 반도지는 연못의 모습이 한반도를 닮았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3월 하순에 접어드는 날, 경남 하동군 화개면 목압마을 위에 있는 국사암으로 향했다. 불일폭포로 가기 위함이다. 폭포는 쌍계사에서 바로 오를 수도 있으나, 오래전 추억을 떠올리며 걷고 싶어 이 길을 택했다. 구례에서 하동으로 이어지는 길 주변은 잎과 꽃을 틔우고 있는 수목들의 움직임으로 분주한 모습이다. 노랑 산수유 꽃으로 마음을 달뜨게 하던 길은 이내 팝콘처럼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벚꽃 길로 바뀐다. 그런데 섬진강변으로 들어서자 풍경이 심상치 않게 변한다. 맙소사! 쌍계사로 이어지는 ‘십리벚꽃길’은 어느새 눈부신 벚꽃터널을 이루고 있다. 아직 개화가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이제 곧 화개(花開)라는 이곳의 이름처럼 환한 꽃세상을 이룰 것이다.

네 줄기 가지가 거대한 나무를 이룬 사천왕수와 쌍계사의 부속암자인 국사암을 둘러보고 정갈한 숲길을 걸어 불일폭포로 향한다. 쌍계사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 ‘15-1 이정표’를 지나면 왼쪽 산자락으로 오름길이 있다. 이 길은 쌍계사를 창건한 진감혜소선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승탑이 있는 곳으로 이어진다. 승탑을 둘러보고 느린 걸음으로 약 1시간 남짓 걸어 너른 공간을 이루는 불일평전에 닿았다.

이곳에서의 추억을 되살려주던 ‘봉명산방’은 이제 철거가 마무리된 모습이다. 봉명산방은 예전 변규화 선생이 약 30년 동안 거처하던 곳이다. 안타깝게도 선생은 2007년 6월에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고, 집은 그 후 방치되며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남아 있다가 이렇게 사라져버린 것이다. ‘봉황이 우는 곳’이라는 의미의 당호는 소설가 정비석 선생이 지은 것이라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시던 어른의 모습이 아련하다. 키 큰 목련과 고욤나무는 여전히 의젓하고, 남새밭의 담장을 이루던 매화나무와 노각나무도 반갑다. 선생이 쌓은 ‘소망탑’과 ‘반도지(연못)’가 잘 보존되어 이곳의 이야기가 오랫동안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불일평전에서 잠시 올라 만나는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다리와 벼랑허리를 이은 길을 걸으면 불일암에 닿는다. 예전 아슬아슬하게 이어진 ‘잔도(棧道)’로 유명한 곳이다. 유람 온 사람들 중 태반이 길이 무서워 구경을 포기하고 되돌아갔다고 한다. 깊은 산중에 마치 절해고도처럼 자리 잡고 있는 불일암은 신라 하대에 진감선사가 창건하였고, 고려시대에는 불일보조국사가 수도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내력은 알 수 없다. 화재로 건물이 타버린 채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이 절집은 2008년에 중창되었고, 대웅전, 요사 겸 선방, 산신각의 작은 건물들로 이루어져있다.

우담 정시한은 1686년 한여름을 지리산 삼정산 자락 상무주암과 불무장등 금류동암에서 독서하며 지내다가 초가을 무렵 쌍계사에 들러 불일암에 올랐다. 이때 그는 그의 『산중일기』에 ‘진작 이곳을 알지 못하여 이곳에서 여름을 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생각해 보니 상무주암이나 금류동암은 이곳에 비하면 아이들 장난에 불과하다. 사랑스러워 떠나지 못하고 오랫동안 바라보았다’라며 이곳의 풍광과 분위기에 매료된 모습을 남기고 있다.

이때 우담은 이곳에서 솔잎을 먹으며 홀로 수도하며 지내고 있는 40세의 수좌승 성욱을 만났다.

‘발우 하나 옷 한 벌로 암자를 중수하였고, 앞으로 이곳에서 겨울을 날 계획이라고 한다. 사람 됨됨이가 바르고 맑아 사랑스러운데, 용모는 스무 남짓으로 보인다.’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청빈한 삶을 살아온 60대의 도학자와 적막한 산중암자에서 홀로 수도하고 있는 40대의 수도승이 서로 마주보며 소통하는 맑고 따뜻한 풍경이 그려진다.

불일암을 나와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왼쪽 모퉁이에 얼마 전 발견된 완폭대(翫瀑臺) 각자(刻字)가 희미하게 보인다. 불일폭포는 불일암 아래에 있다하여 이름 지어졌을 것이다. 어제 비가 그리 많이 내리지는 않았지만, 60여 미터 거대한 물기둥은 늘 그렇듯 헌걸찬 모습으로 낙하하고 있다. ‘내원골’을 이루며 쌍계사 앞으로 흘러가는 이 물길은 바로 ‘쌍계’라는 두 물줄기 중 한 곳을 이루게 된다.

숨 가쁘게 제 갈 길을 달리는 봄의 산자락을 만나며 얼마 전 어느 스님이 쓴 글을 떠올린다. ‘급하지 아니한가!’ 무기력하게 움츠려있음을 시절 탓으로 돌리며 변명하고 있기에는 마음이 급하지 아니한가.

협동조합 지리산권 마실/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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