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시절 스러져간 그들에게 위로를

[한국농어민신문] 

1994년 폐교된 옛 삼장초등학교 유평분교. ‘가랑잎 분교‘라는 예쁜 이름으로 불리던 곳이다. 얼마 전만해도 ‘산청유평학생야영수련원‘으로 이용되었으나, 최근에는 성수기임에도 불구하고 문이 굳게 잠겨있다. 
1994년 폐교된 옛 삼장초등학교 유평분교. ‘가랑잎 분교‘라는 예쁜 이름으로 불리던 곳이다. 얼마 전만해도 ‘산청유평학생야영수련원‘으로 이용되었으나, 최근에는 성수기임에도 불구하고 문이 굳게 잠겨있다. 

지난 호에서 대원사와 관련된 불교사(佛敎史)적 내력이 만만치 않으며, 옛 사람들은 대원사 계곡 일대를 장항동이라고 불렀다는 문헌기록도 소개한 바 있다. 절집 앞에 세워진 안내판의 ‘대원사 연혁’ 내용을 마저 읽어보자.  


“여수·순천 10·19사건(1948.10.19~1955.4.1) 당시 빨치산의 웅거를 우려한 진압군에 의해 다층석탑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고, 1955년부터 만허당 법일스님이 35년간 중창하여 지리산 대표 비구니 사찰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리산의 깊은 산자락에 들어서 있는 대부분의 절집이 6·25전쟁 이후 빨치산의 활동 근거지를 없애기 위한 토벌대의 작전에 의해 소각된 상황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설명이 조금 아쉽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1948년 12월 25일 산청군 삼장면에 160여 명의 빨치산이 출현해서 대원사를 점거하였다는 사실로 볼 때, 어쩌면 여순사건 이후 지리산에 입산한 봉기군에 의해 피해를 입은 트라우마가 느껴지기도 한다.

오래 전 이병주의 『지리산』을 읽으며 스쳐지나갔던 대원사의 모습이 새삼 궁금했다. 잘 알려져 있듯 『지리산』은 실록소설을 표방하며 1972년도에 집필이 시작되어 1978년에 연재가 끝났고, 이해에 처음 간행되었다(1985년 7권으로 완간). 일제강점기 말 학병 징병을 거부한 젊은이들이 덕유산 은신골에 입산한 후 지리산, 덕유산, 괘관산(대봉산) 등의 산자락을 거점으로 활동하며 일제에 대항하다가 해방을 맞이하고, 이후 이들이 공산당에 입당하여 6·25전쟁을 거쳐 빨치산 활동을 하게 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이야기의 줄거리로 담고 있는 책이다. 

특히 소설 『지리산』에는 해방 직전 일제의 징병과 징용을 피해 지리산에 입산해 있던 사람들의 모습과 해방 이후 정부수립 시기까지의 이념적 갈등이 극렬했던 당시 상황이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는데, 이러한 이야기의 흐름에서 대원사 연혁에 비워져 있는 1947년 이곳의 모습을 메워볼 수 있다.

1943년 8월 징병을 피해 일본에서 귀국하여 덕유산 은신골에 자리를 잡은 하준규, 박태영 등은 그로부터 1년 후 일제에 대한 항거를 목적으로 보광당이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지리산 칠선골과 괘관산으로 거점을 옮기며 머물다가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이즈음 보광당은 조선공산당과 연결되고(소설에는 함께 생활하던 이현상의 입당 권유로 나온다), 이후 당에서는 정치위원을 파견하며 두령인 하준규와 심각한 갈등을 빚는다.

하준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하는데, ‘하준규 부대는 당 중앙 직속으로 하고, 경남도당과는 횡적인 연락만 취하되 필요에 따라 도당을 감찰할 수도 있다’라는 지령을 받고 다시 덕유산으로 돌아오게 된다. 정부수립 1년 전인 1947년 8월 초의 일이다. 돌아오는 길에 하준규는 진주에서 함양으로 직행하는 길을 버리고, 덕산을 거쳐 대원사 주변을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는 강금석 부대에 들른다.

당시 강금석의 부대원은 137명인데, 봄에는 200명이 넘게 있었을 정도로 꽤 많은 대원들이 머물고 있었고, 새재마을 인근 어딘가로 추정되는 4km 쯤 계곡을 거슬러 오른 곳에 경남도당 지리산 파견본부가 있었다는 내용이 둘의 대화에 나온다.

덕유산 자신의 부대로 귀환하는 하준규는 강금석의 부대를 새벽 세시에 출발하였는데, 유평리에 도착하니 날이 훤히 밝았다고 한다. 이런 묘사로 보아 강금석 부대는 대원사를 중심으로 적어도 한 시간 이상 이동시간이 걸리는 산자락 어느 곳에 있었을 것으로 그려볼 수 있겠다. 이날 하준규는 쑥밭재에 오른 뒤 벽송사를 거쳐 함양으로 가려하는데, 바로 조개골, 허공다리골의 노정으로 이동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벽송사 인근에 복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하봉으로 우회하여 칠선계곡으로 내려서는, 그 힘든 걸음 끝에 의탄에 도착하였다. 오늘날에도 너무나 선명한 지리산 곳곳의 지명이자 산길이다.

대원사 연혁에 여백처럼 비어있는 이야기를 들추노라 오랫동안 밀쳐두었던 책들을 다시 펼쳤다가, 결국 여느 때처럼 허허로운 마음으로 덮게 된다. 이념을 떠나, 격동의 시절을 온 몸으로 맞이하며 스러져간 그들에게 위로의 인사드린다. 7월 하순 다시 들른 대원사 계곡은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깊어가는 여름의 짙은 산빛과 계곡 물소리도 여전하다. 유평마을 옛 가랑잎분교에서 오래된 추억을 더듬는데, 문득 ‘허망한 정열’이라는 책의 소제목이 나에게 보내는 외침처럼 가슴을 파고든다.

조용섭/협동조합 지리산권 마실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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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섭의 지리산이야기 <56> 등구사登龜寺 이야기② [한국농어민신문] 1489년(성종20) 4월 14일(음력), 탁영 김일손(1464~1498)은 함양 읍내를 출발하여 14박 15일에 걸친 지리산 유람 대장정에 나섰다. 몇 년 동안 그가 마음에 두고 있던 이 유람에는 함양 출신의 도학자인 일두 정여창(1450~1504)도 동행하였다. “14일(임인일). 드디어 천령(함양)의 남쪽 성곽 문에서 출발하였다. 서쪽으로 10리 쯤 가서 시내 하나를 건너 객사에 이르렀는데, 제한蹄閑이라고 하였다. 제한에서 서남쪽으로 가서 산등성이를 10리 쯤 오르내렸다. 양쪽으로 산이 마주하고 있고 그 가운데 한줄기 샘이 흐르는 곳이 있었는데, 점점 들어갈수록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몇 리를 가서 한 고개를 올랐다. 하인(從者)이 말하기를, ‘말에서 내려 절을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누구에게 절을 하느냐고 묻자 그가 답하기를, ‘천왕天王입니다.’라고 하였다. (중략) 이 날 비가 퍼붓듯이 내렸고 안개가 온 산을 휘감고 있었다. 말에 몸을 맡겨(信馬) 등구사에 이르렀다. 솟아 오른 산의 형상이 거북과 같은데, 절이 그 등에 올라앉아 있는 것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략) 절집 위 동서쪽으로 두 건물이 있었다. 일행은 모두 동쪽 건물에 묵기로 하고 하인들을 가려서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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