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마다 맞이하는 ‘천상의 화원’

[한국농어민신문] 

팔랑치와 바래봉 삼거리 사이에서 바라본 지리산 서북능선 풍경. 중앙의 뾰족하게 솟아오른 봉우리가 정령치 동쪽(0.8km) 백두대간 마루금이 이어지는 고리봉(1305m)이다.
팔랑치와 바래봉 삼거리 사이에서 바라본 지리산 서북능선 풍경. 중앙의 뾰족하게 솟아오른 봉우리가 정령치 동쪽(0.8km) 백두대간 마루금이 이어지는 고리봉(1305m)이다.

‘저절로 걸어 온 봄은 없다.’고 한 시인은 잘라 말했다. 그리고 그이는 ‘바람조차도 키를 세워 안개를 날랐다’며 산자락의 고단함을 위무하더니, 어느새 ‘꽃불이 탄다, 꽃불이 탄다!’고 아우성이다.

17년 전. 필자가 서울의 모 신문사에 전국의 산길을 소개하는 기사를 연재할 때, 지리산 서북능선 바래봉 철쭉에 대한 글을 쓰며 첫머리에 두었던 내용이다. 그 후 귀농귀촌해서 남원에 살고 있던 2012년에는 바래봉 철쭉제에 참여하여 홍보전시부스를 지키고 있다가 운동화 차림으로 한달음에 팔랑치로 올라 옛 추억을 회상하기도 했다. 2005년에 소개했던 산길은 정령치를 출발하여 팔랑치 인근의 철쭉 군락을 감상한 뒤 바래봉에 올랐다가, 현재 허브밸리가 들어서 있는 용산마을로 하산하는 코스였다. 이번에도 그 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그런데 자가용이나 택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정령치로의 접근이 현재는 ‘정령치순환버스’라는 대중교통편을 이용할 수 있게 되어 산행 여건이 매우 편리하게 변했다.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통 크게 보시하듯 운행되고 있는 교통편을 아직도 알리지 않은 것은 어쩌면 지리산 이야기꾼으로서 직무유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이번에 정령치순환버스를 이용해 정령치에 오르고, 다소 늦어지긴 했지만 바래봉 철쭉 통신도 전하기로 한 것이다.

올해는 철쭉의 개화가 빨라, 매년 5월 중순에 만개하여 천상의 화원을 이루는 팔랑치의 철쭉이 15일 즈음 이미 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마음이 바빠졌다. 18일 아침 7시 20분 남원역을 출발하는 순환버스를 타고 8시 12분 정령치에 도착했다. 평일이었지만 25인승 소형버스에 15명이 탑승했다. 휴게소 광장에서 손에 잡힐 듯 지척에 있는 반야봉과 저 멀리 아스라이 천왕봉을 비롯한 연봉들이 이어지는 주능선을 조망하고 능선으로 올라섰다.

지리산의 뼈대를 이루는 산줄기는 천왕봉에서 성삼재에 이르는 주능선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산청 웅석봉으로 이어지는 동부능선, 서북쪽으로는 만복대-정령치-바래봉-덕두봉으로 이어지는 서북능선이 있다. 오늘 정령치에서 동쪽으로 향하며 걷게 될 서북능선의 코스별 거리는 바래봉에 올랐다가 삼거리로 되돌아오는 능선 길 10여km, 용산마을까지의 하산 길이 4km 남짓 된다. 모처럼 산길을 걷는 필자에게는 만만찮은 산행이 될 듯하다. 이 길에서 식수를 구할 수 있는 곳은 바래봉 아래 샘터 밖에 없으니 출발 전에 물을 잘 챙겨야한다. 8시 20분 다소 설레고 긴장된 마음으로 출발했다.

5분 정도 걸으면 200~300m 거리에 있는 개령암지와 마애불상군을 만날 수 있는 샛길이 있으나 그대로 지나쳤다. 신갈나무와 철쭉 사이로 난 연록의 정갈한 숲길을 느린 걸음으로 걸어, 출발 30여분 만에 고리봉에 도착했다. 지리산 산줄기가 백두대간과 연결되는 곳이다. 이곳에서 내려서는 백두대간 마루금이 고기삼거리에 닿으면, 산길은 사라지고 평평한 도로로 백두대간 노치마을로 이어진다. 그래도 물길은 갈라져 서쪽으로는 주천면 구룡계곡을 거쳐 요천-섬진강으로 흐르고, 동쪽 운봉으로는 람천을 거쳐 실상사 앞에서 만수천과 합수하며 지리산 낙동강의 수계를 이룬다.

세걸산(11시 20분)을 지나 세동치에서 가파른 길을 오르자 진행방향 오른쪽에 줄곧 따라오던 반야봉도 저만치 뒤로 자리를 바꾸었고, 중북부능선에 가려져 있던 주능선 형제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정면으로 시계(視界)가 열리는 곳에서는 바래봉도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늘진 곳에서 점심식사 후 부운마을로 이어지는 부운치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1시 55분, 이제 하늘정원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힘을 내어 약 30분 정도 진행하여 철쭉 군락지가 시작되는 ‘산덕 임도’ 갈림길에 도착했다. 시인이 키를 세워 안개까지 나르며 천상의 화원을 일구었다는 바람은 이제 꽃잎을 사정없이 떨구며, 황홀했을 올해의 풍경을 마무리하고 있다.

아쉬운 마음에 한동안 팔랑치 인근을 서성이다가 바래봉 삼거리로 향했다. 삼거리에서는 바래봉을 오르지 않고 곧장 용산마을로 내려섰다. 16시 25분, 하산하는 길은 너르고 가파른 임도에 돌을 깔아놓아 걷기가 쉽지 않다. 1시간 30분 만에 힘들게 용산마을(허브밸리)에 도착하며 산행을 마쳤다. 19시 13분 운봉읍행정복지센터에 정차하는 정령치순환버스를 기다리지 않고, 운봉우체국 앞 정류소로 걸어가(2km) 18시 35분 출발하는 일반시내버스를 타고 남원시가지로 향했다.

남원역을 출발하여 정령치까지 운행되는 정령치 순환버스는 두 코스로, 상·하행 각각 하루 3회 운영된다. 1코스는 주촌 지리산 둘레길 안내센터를 경유하여 곧장 정령치로 오르며 약 50여분 소요된다. 2코스는 운봉-인월을 경유한 후, 뱀사골과 달궁계곡이 있는 반선-달궁을 거쳐 정령치로 오르며 1시간 40여분 걸린다. 요금은 1000원이다.(문의:남원여객 063-631-3116)

조용섭/협동조합 지리산권 마실 이사장

관련기사

조용섭의 지리산이야기 <56> 등구사登龜寺 이야기② [한국농어민신문] 1489년(성종20) 4월 14일(음력), 탁영 김일손(1464~1498)은 함양 읍내를 출발하여 14박 15일에 걸친 지리산 유람 대장정에 나섰다. 몇 년 동안 그가 마음에 두고 있던 이 유람에는 함양 출신의 도학자인 일두 정여창(1450~1504)도 동행하였다. “14일(임인일). 드디어 천령(함양)의 남쪽 성곽 문에서 출발하였다. 서쪽으로 10리 쯤 가서 시내 하나를 건너 객사에 이르렀는데, 제한蹄閑이라고 하였다. 제한에서 서남쪽으로 가서 산등성이를 10리 쯤 오르내렸다. 양쪽으로 산이 마주하고 있고 그 가운데 한줄기 샘이 흐르는 곳이 있었는데, 점점 들어갈수록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몇 리를 가서 한 고개를 올랐다. 하인(從者)이 말하기를, ‘말에서 내려 절을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누구에게 절을 하느냐고 묻자 그가 답하기를, ‘천왕天王입니다.’라고 하였다. (중략) 이 날 비가 퍼붓듯이 내렸고 안개가 온 산을 휘감고 있었다. 말에 몸을 맡겨(信馬) 등구사에 이르렀다. 솟아 오른 산의 형상이 거북과 같은데, 절이 그 등에 올라앉아 있는 것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략) 절집 위 동서쪽으로 두 건물이 있었다. 일행은 모두 동쪽 건물에 묵기로 하고 하인들을 가려서 돌려보냈다.”
저작권자 © 한국농어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