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고선 끼고 모퉁이 돌며 ‘구롱’ 이어져

[한국농어민신문]

의론대로 추정되는 곳에서 바라본 함양독바위. ‘노장대’라고도 부른다. 점필재는 신열암의 동북쪽에 높이가 천여 척(尺)이나 되는 독녀(獨女)라는 바위가 있는데, “한 부인(婦人)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道)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올라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라는 동행한 승려 법종의 말을 빌려 옛 이름의 유래를 전하고 있다.

지난 호 ‘지리산 이야기’는 점필재 김종직 선생(1431~1492)이 함양군수로 재임 중이던 1472년 8월 14일부터 8월 18일(음력)까지 4박 5일간 지리산을 유람하며 남긴 「유두류록」 노정의 첫날 이동 코스인 적조암~함양독바위~고열암터(현재의 지명)에 이르는 동선과, 점필재가 ‘의론대’에서 바라보았던 ‘미타봉’으로 추정되는 와불산까지 답사한 길을 소개하였다. 고열암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아침 길을 나선 점필재 일행은 지리산 동부능선 쑥밭재 인근에 있었던 ‘청이당(淸伊堂)’이라는 당집 인근에서 휴식을 취한 후 가파른 길을 올라 영랑재(永郞岾)에 이르고, 소년대-해유령-중봉을 거쳐 저녁 무렵 천왕봉에 올랐다고 하였다. 이 노정은 천왕봉에서 중봉-하봉-쑥밭재-새봉-왕등재-밤머리재에 이르는 오늘 날 ‘지리산 동부능선길’로 불리는 코스인데, 쑥밭재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은 지금도 오르기가 쉽지 않은 힘든 코스이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답사코스는 와불산(미타봉)에서 내려와 ‘청이당 터’까지 진행하였다가 ‘허공달골’을 거쳐 추성리 광점동으로 하산하는 길이다.

벽송사능선 상의 봉우리인 와불산을 내려서서 조금 전 지나왔던 능선으로 되돌아 이동하던 지리산역사문화조사단의 선두는 갑자기 산죽이 빽빽이 들어서있는 오른쪽의 산자락으로 몸을 감추듯 사라져버린다. 이른바 ‘구롱(九隴. 아홉모랭이(모퉁이))’이 시작되는데, 점필재는 다음과 같은 글로 이 곳의 풍경을 전하고 있다.



‘한 언덕을 지나니 해공이 말하기를, “이것이 구롱(九隴)가운데 첫째입니다.” 하였다. 연하여 셋째, 넷째 언덕을 지나서 한 동부(洞府)를 만났는데, 지경이 넓고 조용하고 깊고 그윽하며, 수목들이 태양을 가리고...(하략)’[한국고전번역원]



이날 필자는 ‘구롱’을 들어설 때, 산모퉁이를 돌며 왼쪽으로 굽이굽이 이어지는 길이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함양독바위 위에 있는 ‘상내봉 삼거리’에서 동부능선 새봉을 잇는 ‘사립재 능선길’과 만날 것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결국 필자는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즉 왼쪽으로 모롱이(모퉁이)를 돌며 진행하는 길은 동쪽으로 향하는 것으로 생각하였고, 남쪽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어느 지점에서인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야만 한다고 예상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길은 계속 정면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트랙을 확인해보니 등고선을 끼고 모랭이를 돌며 진행되는 길은 대체적으로 남쪽으로 일관되게 향하며, 쑥밭재 직전 동부능선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동선 상에는 점필재가 ‘동부(洞府)’라고 언급한 곳으로 짐작되는 산자락의 공간이 확 트이는 넓은 공간이 있는가하면, 바닥에 인위적으로 깔았음직한 큰 돌들이 제법 너르게 노폭을 유지한 채 한동안 이어지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전 주막이 있었다는 집터를 지나 약 20여 분 진행하면 ‘방장문(方丈門)’이라는 글이 새겨진 석문을 만나는데, 이곳에서 약 30분 후에 동부능선에 닿게 된다. ‘방장문’ 각석(刻石)은 「유두류록」에 언급되지 않는다. 쑥밭재를 지나면 이내 점필재가 쉬어갔다는 ‘청이당’ 당집 터 옆에 있는 계류를 만나게 된다. 해발 1250m 고지의 이곳에는 산청 유평리(조개골)로 흐르는 큰 물길이 세찬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고, 인근에는 ‘당집’의 석축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흔적들이 아직도 완연히 남아있다. 지리산역사문화조사단은 청이당 터에서 더 이상 오르지 않고, 허공달골로 내려서서 외딴집이 있는 어름터를 거쳐 광점동에서 답사를 완료하였다.

이번 답사는 함양군수로 재직하며 지리산과 인연을 맺은 김종직이라는 역사인물이 저술한 「유두류록」의 노정을 답사하며, 당시 깊은 지리산 산자락에 있었던 산중암자와 지리산의 풍경을 살필 수 있는 길 콘텐츠 발굴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현재 제반 여건을 감안할 때 ‘점필재로’(가칭) 코스 전체를 이으며 답사하기는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다만 비교적 접근성이 좋고 산길도 잘 나있는 함양독바위로 오르는 길과, ‘조선불교의 대들보’라고도 할 수 있는 벽송사를 잇는 길이 개방될 경우, 조선시대 선비의 지리산 유람과 불교사를 살필 수 있는 소중한 역사문화생태자원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협동조합 지리산권 마실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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