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은

[한국농어민신문] 

육지는 농한기라는 새로운 라이프가 펼쳐진다. 농한기라 해서 아예 일이 없는 건 아니다. 그동안 못한 농장 정리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들깨 대, 콩대, 나뭇가지 등 버려야 할 것투성이다. 과수원을 운영하는 나는 밭작물을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보다 더 바쁘다. 봄이 오기 전에 전정을 해야 한다. 여름에 못 잘라준 도장지를 잘라주고, 꽃눈이 얼마 안 생긴 나뭇가지를 잘라버린다. 그리고 내 마음 한편에 묻어둔 것들까지도 잘라버린다.

겨울에 전정을 하면서 깨달은 건 나한테도 버릴 게 있다면 버려야한다는 것이다. 매년 겨울마다 나뭇가지를 정리하면서 내 마음속도 정리하고 있다. 버릴 것과 나눌 것을 구분하면서 그렇게 농한기를 살피고 있다.

전정을 하더라도 돌아서면 풀이 자라있는 여름보다는 할 일이 적은 편이다. 여름에는 2~3일에 한 번씩 풀을 깎아주느라 농장을 벗어나기가 무서운데 겨울에는 농촌의 만물이 겨울잠을 자는 시기라 한결 편안한 시기이기도하다. 이럴 때는 농번기에 못 잤던 잠도 자곤 하지만 여행을 떠나곤 한다.

나에게 겨울이란 품앗이 여행이 기대되는 계절이다. 육지는 농번기와 농한기가 나뉘어 있지만 제주에는 겨울에도 농번기다. 제주에 있는 농부 친구들을 만나 그동안 우여곡절을 나누고 서로의 기후변화를 이야기하며 한숨 섞인 이야기를 들어준다.

올해로 5년째, 정말 머나먼 여정인 '수확여행'을 떠났다. "올해는 주말에 수확할 건데 와줄 수 있나요?" 당연히 오케이! 짐을 꾸리고 친구들에게 줄 선물까지 챙겨서 배에 차를 싣고 가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리지만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힘들었던 육지 이야기를 어떻게 나눌까?', '이번에 힘 좀 길러놨는데 당근 많이 뽑아줘야지', '동쪽에서 시내로 나올 일도 없을 텐데 뭐 맛있는 거 사갈까' 제주에 일하러 가는 마음이 이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제주에 당근과 감자를 수확하는 농부 친구들도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환하게 환대해준다. 제주 삼촌들과 제주 친구들도 소개해주면서 제주에 대해 알려주는데 이만한 여행 안내자가 없을 것이다.

주변에서는 내가 제주까지 배를 타고 당근 뽑으러 갔다고 하면 농한기에 알바하러 갔다 왔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내게는 알바라기보다는 겨울 품앗이이다. 대가를 받고 일하는 게 아니라서 제주 농부 친구들조차도 도대체 왜 시간과 돈을 들여서 왔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나는 사람이 좋아서 왔다고 대답한다. 할머니들과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함께 나눌 수 있고, 그러면서 나는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져서 집으로 돌아간다. 품앗이라는 공동체에 익숙해져서 제주라는 먼 곳이 멀지 않게 느껴지고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겨울이면 여행하듯 다녀오는 곳이다.

어쩌면 내가 농촌에 아직 남아있고, 농촌을 좋아하는 이유가 사람에게 있지 않을까. 할머니들과 오손도손 밥 한 끼 먹는 걸 좋아하고, 수다를 떨면서 혼자서는 힘들었던 농사일에 대해서 나누고, 할머니들과 대화가 안 통하면 겨울에 제주 청년 농부들과 밭에서 당근을 수확하며 푸는 것이 나만의 농사 패턴이다. 나는 앞으로도 누군가 정한 농부 패턴에 끌려가지 않고 나만의 건강한 농촌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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