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은
[한국농어민신문]
2015년 귀촌을 하면서 블로그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농사지을 생각은 꿈에도 없어서 막연하게 블로그 명을 끄적이기 시작했다. ‘이장이 꿈인 여자 프로 시골러’ 7년 전 내가 지은 블로그명이 지금 나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있다는 걸 그때는 정말 몰랐다. 지금은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알고 있다. ‘예비 이장, 안떡국’ 30대 초반의 여자가 예비 이장이라는 타이틀도 새로운데 이름 또한 안떡국이라니! 이런 특이한 타이틀 덕분에 나의 농촌 이야기로 사람들에게 관심을 쉽게 살 수 있었다.
떡국이라는 이름은 내가 붙인 게 아니다. 마동리 주민들이 불러주셔서 나도 내 본명을 까먹을 정도다. 마동리에서 ‘안재은’이라는 이름 석 자는 전혀 들어볼 수 없고, “떡국아~”, “안떡국이” 정도로 들어볼 수 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분 중에 청주시 문의면 마동리에 방문한다면 안떡국 이름 석 자로 환대를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작은 마을에서 왜 떡볶이도 아닌, 인절미도 아닌, 떡국이로 불렸을까?
2015년 부모님을 따라 억지로 귀촌을 하면서 수도권으로 진출하기를 꿈꾸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농촌이 괜찮았다. 그리고 그 괜찮은 이면에 안 괜찮은 것들이 보였다. 농촌에는 어르신들이 정말 많다는 것, 그리고 그 분들이 농사 이외에 할 일이 없다는 것이 나의 처음 관심사였다. 반면에 농촌에는 없는 다양함을 즐기는 도시의 청년들은 복잡하지 않고 단조로운 시골을 선망했다.
이 둘을 이어주는 프로그램을 마동리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청년들은 난생처음 농촌에서 어르신들과 만나 윷놀이, 연 만들기, 새끼 꼬기, 손칼국수 만들기를 하면서 시골의 정을 느낄 수 있었다. 농한기인 겨울에 진행하다보니 매 해 어르신들과 새해를 보면서 떡국을 끓여드렸다. 그런데 새로운 젊은 사람에게 익숙하지 않은 어르신들은 마동리가 아닌 곳에서 만나면 나를 못 알아보셨다. 그래서 마동리 어르신들을 만날 때 마다 “저 떡국 끓여줬던 사람이에요”라고 소개를 하고 다니다보니 어르신들은 “아~ 떡국 끓여준 양반이구만”이라고 하시다가 그냥 떡국이라고 부르게 됐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떡국이를 아는 분들이 반도 안됐다. 할아버지 한 분은 아직도 나를 “뻐꾹이”라고 부르신다. 지금은 방송국에서 인터뷰를 나오면 어르신들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떡국이 이름 창시자는 나다!”라고 외치셔서 마을회관에서 때 아닌 ‘떡국이 창시자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다 농사에 관심을 갖게 되어 마동리에서 농사를 짓게 되고, 농사를 짓다보니 어르신들과 더 친해지게 됐다. 젊은 아가씨랑 말 섞을 일이 거의 없던 어르신들은 “콩 심는 방법 알려주세요” “씨 마늘 할아버지 마늘로 살게요”라고 졸래졸래 쫓아오며 말을 거는 나와 마음의 거리를 좁혀주셨다. 어르신들과 친해지고 이 정겨움이 마음에 들 때 쯤, 마동리 이장이 되는 걸 자연스럽게 꿈꾸게 됐다. 그리고 SNS와 유튜브 채널에 ‘20대에 이장이 꿈인 안떡국’이라는 타이틀을 노출시키게 됐고, 예전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안떡국”, “이장님”이라고 불러준다.
그럼 지금 나는 이장이 되어있을까? 올해 마을 이장이 바뀌었지만 나는 후보에도 들지 못했다. ‘이장은 마을의 어르신’이라는 어르신들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나는 어리기 때문에 이장을 꿈꿀 수 있지만, 이장을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어르신들의 입에서는 “여자가...”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옆 마을 이장님은 여자 이장님이지만 더 깊은 산골에 있는 우리 마을은 아직 여자는 이장후보에도 올라갈 수 없다. 벌써 농촌에서는 청년 이장이 나오기 시작한다. 얼마 전에 28살 청년이 마을이장이 됐다는 걸 보고 괜히 내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도 희망이 있는 건 2년 전만 해도 “아가씨를 누가 이장을 시켜줘”라고 말했던 분들이 이제는 “다음에는 이장 한번 혀 봐”, “여자는 이장하면 안댜? 웃기고 있네”라면서 공감을 해주신 덕분에 10년 안에는 나에게도 기회가 오지 않을까. 그런데 그때는 마동리에 몇 분이나 남아계실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