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 대의원총회 흔한 풍경 “대충 하고 밥 먹으러 갑시다”

[한국농어민신문 이상길 농정전문기자]

▲ 아는 것이 힘이다. 농협이 농민의 조합이 되려면 협동조합을 아는 조합원, 바른 조합장이 필요하다. 사진은 한국농업연수원의 2019 전국동시조합장선거 출마자 교육.

1년 살림 꼼꼼히 챙겨야하지만
회의시작 후 금세 파장 분위기
소신 발언 했다간 따돌림 일쑤
관습에 매여 스스로 권리 포기


“그만 밥 먹고 합시다.” 지역농협 대의원총회에서 단골로 나오는 말이다. 지역농협에서는 조합원 총회를 대신하는 대의원회총회를 운영한다. 문제는 이 대의원총회를 대부분 오전 10시나 11시에 시작한다는 점이다.

의례 거치고, 보고 받으면 곧 점심시간이 된다. 관심 있는 대의원들이 뭔가 묻는다거나 문제제기를 해서 회의가 조금 지체될 것 같으면 한쪽에서 “그만 밥 먹고 합시다”라고 파장 분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한다. 회의는 일사천리, 조합이 제출한 원안대로 끝나고 대의원들은 회의 참석에 따른 일비와 식사 대접을 받고 돌아간다. 이것이 상당수 농협의 대의원총회 풍경이다.

물론 회의 길어지는 것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렇지만 대의원회는 조합의 사업계획과 수지예산을 편성하고 결산을 처리하며, 정관과 규정 변경 등 사실상 조합 살림의 대부분에 대해 최종 결정권을 행사하는 기구다. 조합장과 임직원의 보수, 급여도 당연히 여기서 결정된다. 조합의 이사나 감사가 아닌 이상, 사실상 조합원들이 자기 조합의 1년 동안 운영 전반에 대해 들여다보고, 생각하고, 결정하는 중차대한 자리가 대의원총회 말고는 없다. 대의원들은 조합원을 대표해서 조합의 운영을 꼼꼼하게 챙겨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의원회에서 발언을 하고 문제를 지적해서 고쳐 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소신발언을 하면 따돌림 당하고 비난받기 십상이다. 지역에서 이런 저런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데 더 까칠하게 따지기는 힘들어진다. 인간관계도 무시할 순 없지만, 조합에서 농자재를 갖다 쓰고, 농산물 출하를 맡기고, 대출금이 있는 농민으로선 조합 임직원들이나 다른 대의원들과 각을 세우는 듯한 모양새가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다.

농협대의원을 지낸 경북 봉화의 한 농민은 “대의원으로서 의무감 때문에 요주의 대상으로 찍히더라도 발언을 할라치면 대충 하고 밥 먹으러 가자는 소리가 나온다”면서 “발언도 요구도 하지 않는 조합원이 농협을 바꿀 수 없는 만큼 참여와 발언, 토론이 활발한 대의원총회로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한 전직 조합장은 “이사와 대의원이 있지만 조합의 모든 결정은 경영진의 뜻대로 이뤄져 왔고, 조합원들도 이런 운영에 길들여져 스스로 ‘밥 먹으러 가자’고 권리를 포기했다”며 “조합원 중심의 농협, 조합원이 참여하는 농협이 개혁의 핵심”이라고 지적했다.


태생적 한계에 협동조합 원칙 ‘실종’…조합원 먼저 깨어나야

잘못 꿴 첫 단추, 관제농협

정부 임명 임직원이 농협 차지 
관제조직에 이름만 내건 꼴

신용·경제 합친 세계 유일 체계
새마을 운동 앞장서 몸집 불려

1987년 민주화의 산물 ‘직선제’
MB정부때 ‘간선제’로 뒷걸음질


오늘 농협은 왜 농민의 협동조합이면서도 비민주적인 운영으로 농민 조합원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 걸까? 그것은 우리나라의 농협이 관제조합이라는 태생적 한계에서 비롯됐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관제조합이라는 본질을 고치지 못하다보니 농민 조합원 중심의 민주적 운영이 정착되지 못하고 임직원의 협동조합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협동조합 개혁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최양부 전 대통령 농림해양수석비서관은 “농협은 출발부터 관제조직이었고, 박정희 시대, 새마을 운동을 거치고, 전두환 시절 국보위 거치는 과정에서 사실 협동조합일 수가 없는 조직이 됐는데도, 미련을 가지고 협동조합 답게 농민의 것으로 만들겠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다”면서 “생각을 바꿔서 지금까지와 다르고 근본적인 방식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말한다.

농협의 출발은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졌다. 1957년 농업협동조합법의 제정과 함께 정부주도로 협동조합이 전국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했고, 1958년에는 중앙회가 결성됐다. 문제는 단위조합과 시군조합, 중앙회의 임직원들의 자리를 일제시대 농민들을 감독하고 감시하던 총독부 조직인 식산계, 금융조합, 대한농회에서 일하던 인물들이 대거 차지했다는 것이다. 농민들은 정부의 강제로 조합원이 되었지만 농협의 주인이 되지 못했고, 정부가 임명한 임직원들이 농민 위에 군림하는 조직이 됐다.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이 합쳐진 세계 유일의 종합농협 체제는 박정희 군사정권 때인 1961년 농협과 농업은행을 통합하면서 완성된다. 1962년에는 ‘농협임직원 임면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면서 농협중앙회장은 대통령이, 단위조합장은 중앙회장이 임명했다. 중앙회 부회장과 이사는 농수산부 장관의 승인을 얻어 회장이 임명하고, 감사는 농수산부 장관이 임명했다. 이렇게 협동조합의 원칙이 무시된 관제조직이 농협의 이름만 내건 꼴이다. 농협은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 운동에 앞장서 호가호위하면서 몸집을 불렸다.

이러한 임명제는 1987년 민주화 투쟁으로 1988년 특별조치법이 폐지되고 농협법이 개정돼 조합장과 중앙회장을 직선제로 뽑게 될 때까지 30년간 이어진다. 하지만 농협 민주화 이후에도 농협은 조합장과 중앙회장의 선출이 직선제로 바뀐 것 말고는 관제농협의 본질이 바뀌지 않았다. 정부의 직접적인 간섭이 완화된 대신, 필요에 따라 관료와 연합해 임직원 중심으로 조직이기주의를 추구하면서 여전히 농민 조합원은 배제되고 있다. 정부의 농협이 임직원의 농협이 된 것이다.

심지어 농협과 정부는 민주화의 성과인 직선제를 문제 삼으며 농민들의 권리를 축소하려 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선거과열 방지와 전문경영을 위해 직선제 폐지가 불가피하다는 논리로 법을 고쳐 중앙회장을 조합장 중에서 뽑힌 소수의 대의원들이 선출하는 간선제로 바꿔버렸다. 아울러 농협을 상향식 연합조직으로 개혁하라는 요구를 외면하고, 중앙회 아래에 지주회사를 만들면서, 농협중앙회는 농민 조합원과 완전히 멀어졌다. 농협 출범 이후 60년이 지나는 동안 세상이 바뀌고, 정권이 바뀌었어도 농협은 아직도 농민의 것이 아니라 농민 위에 군림한다는 소리를 듣는 이유다.


정부에 휘둘리는 중앙회, 위임 받은 권한으로 조합 통제

원칙에 어긋난 비민주적 운영

농협법의 ‘최대봉사 원칙’따라
회원 이익 증진 힘써야 하지만
현실은 ‘자체 사업’에만 열 올려

독단적·불투명한 조합 운영 아래
이감사·대의원은 들러리 전락
부정·비리 등 대형사고 줄이어


국제조합연맹(ICA)은 가입의 자유, 조합원에 의한 민주적 관리, 조합원의 경제적 참여, 자율과 독립, 교육 훈련 및 정보제공, 협동조합 간 협동,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를 협동조합 운영 7대 원칙으로 정하고 있다. ICA는 “협동조합은 조합원에 의해 관리되는 민주적인 조직으로서 조합원들은 정책 수립과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선출된 임원들은 조합원들에게 책임을 지고 봉사한다. 단위조합의 조합원들은 1인1표의 동등한 투표권을 가지며, 연합단계의 협동조합도 민주적인 방식에 따라 관리 된다”고 설명한다. 이것이 조합원에 의한 민주적 관리 원칙이다.

레이드로우(A. F. Laidlaw) 박사는 “민주주의는 협동조합 조직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의 하나이다. 이 요소가 결여된 조직은 진정한 협동조합이라 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협동조합의 핵심요소인 조합원에 의한 민주적 관리가 사라졌거나 훼손된 조직은 이미 협동조합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농협은 협동조합 원칙을 제대로 지키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진정한 농협은 농민 조합원이 주인일 때라야 농협이라 할 수 있다. 주인인 조합원이 “스스로, 함께 소유하고, 이용하고 운영하는 내 조합”이라야 농협인 것이다.

관제조합으로 탄생한 농협은 그 태생적 문제점을 그대로 안은 채 농민 조합원에 의한 민주적 관리를 비롯한 협동조합 원칙이 실종되고, 이제는 “임직원의 협동조합”으로 “중앙회는 조합 위에 조합은 농민조합원 위에 군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농협중앙회는 농민의 필요에 의해 탄생한 것이 아니라 정부에 의해 만들어졌고, 아직도 정부의 간섭과 지배에서 독립적이지 않다. 반면 농협중앙회는 정부로부터 위임 받은 감독권과 각종 자금 및 사업 집행권으로 조합을 통제한다. 농협법에 따르면 농협중앙회는 회원의 공동이익의 증진과 그 건전한 발전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또 조합과 중앙회는 그 사업 수행 시 조합원이나 회원(조합)을 위하여 최대한 봉사하여야 한다는 최대봉사 원칙이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농협중앙회는 회장만 대의원 조합장들이 뽑을 뿐, 조합의 연합조직이라기보다는 조합을 통제하면서 자체 사업을 하는 조직이라 비난 받는다.

지역 농협의 현실은 어떤가? 조합원의 대표로서 경영진을 견제해야 할 이 감사 등 임원들과 대의원들은 조합의 독단적이고 불투명한 운영 아래서 경영진의 들러리나 거수기 역할에 그친다는 지적이 많다. 농협은 예결산보고서나 사업계획, 결산평가, 자체 감사를 위한 필수적인 자료에서부터 조합원은 물론이고 이감사 대의원들도 형식적인 내용 외에 실질적인 자료에 접근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일부 이감사들이 조합원들에게 책임감을 갖고 열심히 활동하려 해도, 농협 임직원들의 조직적인 관리와 견제로 고충을 겪는다.

농협은 협동조합 원리, 농협법과 정관 및 제규정, 회계, 인사노무 등에 대해서는 조합원에게 자세히 교육하지 않는다. 심지어 정부나 지자체 지원으로 농민단체가 진행하는 대의원 이감사 교육이 농협의 반대 속에서 지원이 중단되기도 한다. 이런 풍토에서 농협 개혁운동은 힘을 잃고, 농민 조합원들은 농협 운영에서 더욱 소외된다.

고인물은 썩기 마련이다. 지난 60년 동안 농민조합원에 의한 통제에서 벗어난 비민주적인 운영 속에서 농협은 일선 조합이나 중앙회나 부정, 비리, 대형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그 유형은 부정대출에서부터 횡령, 판매대금 사기까지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장을 망라하며, 피해금액은 매년 천문학적이다. 최근에는 연합사업이란 이름으로 만든 ‘조합공동사업법인’의 부실과 불투명한 운영이 도마에 오른다.

 

조합원 공부모임 조직
협동조합 교육 통해
농협개혁 참여 유도를

조합원이 주인 되는 농협으로


전문가들은 협동조합 교육과 민주적 관리를 뗄 수 없는 관계로 본다. 농민 조합원이 주인임을 자각하도록 교육하고, 이를 바탕으로 조합원들이 운영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양부 박사는 “농협과 정부는 50년이 넘도록 농민들에게 협동조합 교육을 안 시키고, 완전히 협동조합에 대해 우민화 정책을 썼다”며 “협동조합 교육을 통해 조합원을 주인으로 깨어나게 하고, 대의원 이감사가 제 역할을 하고, 조합장을 잘 뽑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한 현직 조합장은 “농협개혁은 조합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며 “지금 대의원 총회와 내년 조합장 선거가 연이어지고 있는 국면에서 협동조합을 잘 아는 조합원들이 학습조직을 선도하고 공부하면서 역할 분담을 통해 최고기구인 대의원회를 장악해 나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3.13 조합장 선거가 4개월 남은 지금, 농협을 농민의 조직으로 만들기 위한 시간은 많지 않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지금부터라도 지역에서 조합원 모임을 조직하고 선거에 대비하고, 이후에도 이런 작업은 지속적으로 진행돼야 한다. 협동조합이란 어떤 것인지 조합원들과 공유하고, 올바른 농협을 만들기 위한 정책공약을 조합장 후보들에게 제시하고 약속 받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그리하여 앞으로 우리 농협은 농민 조합원에게 희망을 주는 조합으로, 그 운영은 조합원 중심으로 전환하는 것을 조합장의 책무로 부여해야 한다.

그 내용에는 조합원에 대한 상시적인 협동조합 교육을 포함해 조합의 지배구조를 민주적으로 개혁하는 일이 들어가야 한다. 먼저 대의원회를 실질적인 조합의 최고 의결기구가 되도록 활성화해야 한다. 이는 지역별로 돌아가면서 뽑을 것이 아니라 지역을 대표할 양심적인 조합원을 대의원으로 임명해야 하고, 여성과 품목 등 조합원의 다양한 구성을 반영해야 한다. 이사회의 전문성과 책임성 강화를 위해 사업별 리더와 농민단체 대표 등이 참여해야 한다. 여성 임원의 확대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구매, 판매, 가공, 상호금융 등 사업 과정에 분야별로 조합원의 직접 참여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농식품부는 조합공동사업법인의 운영을 임직원과 조합장 맘대로 할 것이 아니라 조합원들의 의사와 이해관계가 반영되고 투명하게 운영되도록 조합공동사업법인 정관례를 시급히 개정해야 한다.

이상길 농정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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