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이 ‘먼저, 스스로’ 시작하고 실천…주민자치 1번지

[한국농어민신문 이상길 농정전문기자]

▲ 마을순환버스는 안남식 민주주의와 주민자치의 결정판이다. 어르신들과 어린이들은 물론 주민들의 만족도가 가장 높다. 사진: 안남면지역발전위원회.

주민 주도로 지역을 가꾸고 협동하며 살아가는 모델을 꼽으라면 떠오르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장일순 선생으로부터 사회적 경제를 다져온 원주, 친환경농업과 주민운동의 메카 홍성, 로컬푸드가 성공한 완주, 마을 만들기의 원조 진안이 대표적이다. 이들 지역은 협동조합, 친환경농업, 로컬푸드 등 한 마디로 설명할 ‘무엇’으로 유명하다.

그런 점에서 충북 옥천은 무엇을 내세울 수 있을까? 옥천은 대청호를 품고 있는 대전 동쪽의 평범한 군 지역이다. 그 중에서도 안남면은 옥천군의 9개 읍면 중에서도 가장 작은, 인구 1440명의 자그마한 농촌이다. 이런 안남면이 시나브로 ‘주민자치 1번지’이자, 농촌개발 현장에서 주목받는 사례로 떠오르고 있다. 옥천 안남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안남면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가을이면 신명나는 마을축제
할머니들은 글을 배우고
자체 학생회 구성해 운영
‘배바우작은도서관’ 만들어
성장과 추억의 공간으로

안남면 사무소 앞 잔디광장에서는 해마다 가을이면 한 바탕 신명나는 마을 축제가 벌어진다. 마을 사람들이 무대와 객석 구분 없이, 남녀노소가 함께 어우러진다. 바로 ‘안남면민과 함께 하는 작은 음악회’다. 음악회는 풍물단의 길놀이, 민요·난타·댄스공연, 지역 중학교의 사물놀이, 면민들의 장기자랑 등 주민들이 직접 준비하고 참여하는 주민들의 축제다. 먹을거리도 면민들이, 주차정비와 청소, 뒷정리도 안남 사람들이 한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면서 모두 고생했다고, 서로를 대접하며 즐기는 소박한 축제다.

이 축제가 시작된 건 17년 전. 김대중 정부에서 주민자치센터를 시작하던 2002년 4월, 안남면은 옥천군에서 가장 먼저 시범적으로 주민자치센터를 만들었다. 아직은 지역에서 민관협치가 생소하던 시절, 안남면 주민들은 주민자치센터를 설치하고 ‘안남식 운영’을 표방하며 주민 주도 활동을 시작한다. 그 일환으로 2003년 10월25일 주민자치센터를 통해 주민들이 ‘안남면민과 함께 하는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

안남면의 자치활동 중 빼 놓을 수 없는 게 2003년 2월 개교한 ‘안남어머니학교’다. 안남의 할머니들이 글을 배우러 여기저기 타 지역으로 다닌다는 옥천신문의 보도를 접한 안남면 주민들은 어머니들이 글을 배울 수 있는 학교를 우리 스스로 만들자고 합의한다. 농민, 구멍가게 아주머니, 목사, 보험설계사 등 다양한 사람들이 교사를 자처해 스스로 배우고 만들었다. 할머니 학생들이 50여 명 가량 모여들었다. 어머니들은 자체 학생회를 구성하고 학생회비를 걷는다. 수혜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보듬고 스스로 학교를 운영한다. 어머니들은 이제 스스로의 삶에서 뿐만 아니라 안남이라는 공간에서도 주체가 된 것이다.

안남면 사람들은 2007년 ‘배바우작은도서관’ 건립을 “주민자치 운동의 독특한 형태가 녹아든 사례”로 꼽는다. 이는 안남면의 외부 공모로 국립중앙도서관 사업비 2억원을 받긴 했지만 자체 추진위원회가 탄탄하게 받쳐주지 않았다면 실행되지 못할 일이었다. 추진위는 건강원 주인, 농민, 신문기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결합됐다. 이들은 전국의 선진 사례를 견학하고 안남농협과 안남면사무소, 옥천군청과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면단위 도서관의 설치 필요성과 운영방식에 대한 시각을 맞춰 나갔다. 안남농협은 도서관 부지를 영구 무상임대로 제공해주었고, 행정은 매년 운영비와 인건비를 지원한다. 지역의 필요에 따른 주민들의 자발적이고 끊임없는 노력과 연대, 관계기관 협력의 성과다. 도서관은 아이들에게 함께 공부하고, 뛰어놀고, 텃밭도 만들고, 옥수수도 쪄 먹고, 때론 울고불고 싸우는 성장과 추억의 공간이 되고 있다.

◆안남면 자치의 중심, 지역발전위원회

서른 여섯명으로 구성
교육 스스로 꾸리고 예산 집행
지자체 정책 견인하기도

농업농촌 중장기 계획 수립
스스로 브랜드 만들고 디자인
최우선사업 아이디어 공모
마을순환버스 운영 결실

2006년 말 구성된 ‘안남면지역발전위원회’는 안남면 주민자치의 정점이다. 이는 주민 스스로 면의 대소사를 의논하고 집행하는 일종의 면단위 ‘주민평의회’이고, 쉽게 말하면 안남면의 ‘국회’다. 마을 이장과 열두 개 마을 주민이 각기 추천한 마을위원, 그리고 이 스물네 명이 뽑은 안남면 일꾼 열두 명, 모두 서른여섯 명이 주민평의회 구성원이다. 마치 상원과 하원, 지역구와 비례대표를 적절하게 배치한 것 같다. 지역발전위원회는 한 달에 한번 씩 만나 안남의 모든 일을 같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다. 교육도 스스로 꾸리고 스스로 예산도 집행한다.

안남면은 대청호 수변지역이어서 매년 대청호 하류지역의 물이용부담금으로 상류지역 주민지원사업비를 받는다. 안남면은 주민들의 합의로 그 돈의 30%인 매년 1억5천만 원 가량을 모아 이 돈을 안남면의 미래를 위한 종자돈으로 쓰기로 결정하고 계획을 세워나갔다. 그것을 집행하기 위한 도구로 지역발전위원회라는 조직을 만든 것이다.

안남면의 이런 행보는 자치단체와 금강유역환경청의 정책을 견인했다. 옥천군과 금강역환경청은 매년 집집마다 나눠주던 돈 일부를 모아 지역발전에 쓰도록 방침을 정했다. 이는 옥천군에서 시작한 주민참여예산제보다 4년여 앞선 시도이다. 별도로 지역회의를 구성하거나 이장협의회나 주민자치위원회가 대행하는 다른 읍면과 달리 안남면에서는 이 지역발전위원회가 자연스레 주민참여예산 지역회의로 기능한다.

매년 1억여원이 넘는 대단위 주민지원사업비를 안남면지역발전위원회에서 스스로 결정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안남면 농업 농촌 중장기 계획’을 세운 일이다. 매주 교육과 회의의 연속이었지만 열의가 있는 주민들은 끝까지 참석했다. 주민들은 스스로 자체 브랜드도 만들고 비전도 만들고 상징물도 만들었다. ‘행복방앗간 배바우’라는 농산물 브랜드와 ‘살맛나는 지역공동체 안남’이란 지역브랜드도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 브랜드는 주민들이 가장 좋은 디자인과 문구를 스티커 붙이기를 통해 결정했다.

안남면 사람들은 가장 필요한 사업을 지역발전위 주관 지역발전 아이디어 공모를 통해 결정했다. 그렇게 설문조사와 스티커 붙이기를 통해 주민여론에 따라 탄생한 것이 바로 마을순환버스. 마을순환버스는 여객운수사업법 규정, 버스회사 반발 등으로 1년 반 가량 우여곡절을 겪다가 결국 문화시설이나 도서관 같은 곳은 주민 편익을 위해 셔틀버스를 운행할 수 있다는 해석으로 안남면 마을버스가 아니라 도서관 셔틀버스 형식으로 군에서 인건비를 지원받아 운행하게 됐다.

마을버스는 작은 도서관을 기점으로 각 마을의 정류장을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돌고 있다. 무료인 순환버스를 가장 지지한 계층은 할머니들과 어린이들이다. 안남의 가장 약자인 어르신들과 어린이들을 위해 지역 자원을 우선 배분한 결정이야 말로 ‘안남식 주민자치’가 주는 감동이다. 마을버스는 할머니들의 이동권을 보장했고, 어머니학교의 활성화를 가져왔다. 면민들끼리 더 자주 만났고 면에서 구입하는 물품이 늘어났고 하나 둘 사회서비스의 수요가 생기기 시작했다.

안남면 주민들은 면단위 주민자치조직인 지역발전위원회를 중심으로 주민자치위원회 등 행정조직과, 배바우공동체를 비롯한 경제공동체, 어머니학교와 작은도서관 등 생활문화공동체가 어우러져 동심원을 그리며 살아간다. 물론 안남면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주민 간, 조직 간 갈등도 있고, 불통도 존재한다. 그러나 ‘주민 모두 주인이 되어 더뎌도 함께 가는 것’ 이것이 안남면의 생태계다. 주민자치와 지역공동체를 두 축의 화두로 삼아 생활 속에서 실천을 고민하는 안남면의 사례는 주민자치가 지역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 지 보여준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이 상식적 방식으로 문제 풀어가”
주교종 옥천살림 상임이사

평범한 실천이 옥천방식 작동원리
지역발전위가 최고 의사결정기구
노인 복지·작은 학교살리기 지속할 것

“특별할 것 없는 지역에서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서 상식적인 방식으로, 지역과 농업의 문제를 풀어가는 평범한 실천이 이른바 ‘옥천 방식’의 작동원리입니다.” 주교종 옥천살림협동조합 상임이사는 “옥천의 방식은 한방으로 해결하는 대박이 아닌, 서서히 스며드는, 확 드러나는 성과는 없지만 끈질기게 살아남는, 주민이 스스로 먼저 시작하고 지자체와 함께 가는 방식”이라고 했다. 그렇게 옥천 안남면은 우리나라 주민자치 1번지로 불리게 됐다.

옥천군농민회 출신인 주교종 이사는 2002년 안남면에 주민자치센터가 만들어질 때 주민자치위원회에 들어갔다. “중앙정부는 우리가 바꿀 수 없지만, 가장 모세혈관인 안남 촌에서는 안남 식대로 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고민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주민자치센터는 행정하고 같이 하다 보니까, 자율적인 활동에는 한계가 있었고, 이후 2006년 안남면 지역발전위원회가 만들어진다. “안남면이 대청호 상류 지역이라 해마다 지원사업비가 나와요. 이 돈을 면 차원에서 어떻게 쓸 것인가, 의견을 모으고 의사결정에 대표성을 가진 회의체가 필요해서 안남면 지역발전위원회를 만든 거예요.” 물론 갈등도 많았지만, 지금은 지역발전위원회가 결정해야 하는 것으로 그 실체를 인정받게 됐다.

주민 자치를 다진 안남은 다음 단계로 농촌마을개발사업인 산수화 권역사업을 추진하면서 경제사업이 이뤄지고 있다. 모두 안남면 지역발전위원회에서 논의 한 것이다. “안남면 지역발전위원회는 최고의 의사결정기구라고 보면 돼요. 거기서 결정된 것에 의해 사업이 만들어져요. 안남 도농교류센터 자리도 대단위 주민지원사업 지원으로 땅을 샀어요, 이 땅에다가 권역사업을 한 거죠. 안남면 지역발전위원회는 민의의 광장. 민회라고 보면 되고 여기서 결정된 사업은 다른 동그라미들이 이렇게 운영을 하고 있는 거죠.”

권역사업은 몇 개 마을만 하라고 해서 지역의 갈등요소가 된다. 하지만 안남면은 규정 때문에 3개 행정리가 하는 걸로 계획을 올렸지만 실제로는 면 전체를 놓고 사업계획을 잡았다. “그래도 갈등이 생겨요. 쉽지 않은 일이죠. 그래서 전체 의견을 수렴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이런 회의체가 있는 거고요.” 안남의 경우 자치능력의 향상, 지역공동체의 활성화라는 토대 위에서 권역사업을 비롯한 마을만들기가 진행될 수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우리는 한 방은 없어도 맷집은 좋다”고 농을 던지며 웃었다. 필요하면 스스로 한다. 중앙에서 무엇을 해주기를 기다리기 보단 우리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버텨나간다. 한꺼번에 중앙을 바꾸진 못하지만 마을에서, 지역에서, 농사만 유기농이 아니라 사람살이가 유기적인 지역을 만들어 온 안남 주민들의 활동은 농촌 지역개발의 필수요소가 주민자치라는 점을 사례로 보여준다.

그는 “앞으로 또 남은 안남 10년의 목표는 ‘아이가 웃고 어린이가 웃고 어르신이 행복한 안남이 참 좋다’로 해서 노인 복지와 작은 학교 살리기를 할 것”이라고 안남면의 꿈을 소개했다.
 

▲ 산수화권역 배바우도농교류센터. 권역사업 이후 12개 마을 주민들의 출자로 설립된 안남배바우공동체영농조합법인이 운영하고 있다.


‘민관협치, 협동과 연대’…주민 목소리 담도록 시스템 바꿔야

◆자치와 협치로 풀어가는 농촌개발

느슨한 공동체로 끊임없이 연대
행정·농협 등 배제하지 않고 
대화와 요구로 필요한 일 하도록

‘순환과 지속가능성’ 염두에 두고
주변지역 환경·농업 조화롭게 고민

‘주민이 주인’…농촌개발 중심에 
삶의 공간 스스로 기획하고 개척 

시군단위 행정구역에 따른 자치단체의 종합개발계획은 읍 중심으로 모든 개발 여건이 집중되고, 특정 특산품이나 농산물, 문화재에만 집중해 기형적으로 발전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안남면은 농촌 면단위에서 자연스럽고 친밀한 생활공간을 기반으로 면단위 종합개발 계획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행정에서 먼저 한 것이 아니라 주민 스스로 아래로부터의 자치에서 가능했던 사례다.

안남면은 자체 수립한 미래계획을 바탕으로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에 응모, 2009년 선정됐다. 2010년 기본계획서를 만든 뒤 2011년부터 2015년까지 5년 간 54억원의 예산을 지원받아 ‘산수화권역’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지역개발사업을 수행했다. 이 권역사업의 핵심발전 방향은 ‘친환경 학교급식단지 조성과 도농교류 활성화를 통한 로컬푸드 네트워크 거점 조성’이다. 권역사업은 안남면 소재지 중심으로 다섯 개 마을이 권역 대상이지만, 주민들은 이 사업을 전체 면의 사업으로 풀어냈다.

산수화권역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은 사람과 자연이, 농촌과 도시가 관계하며 순환 공생하는 안남면 경제공동체 건설이 목표다. 이 사업으로 배바우도농교류센터, 친환경지원센터, 등주봉 한반도지형 탐방로 정비, 지역공동체 활성화 주민역량강화 등의 사업을 추진했고, 2015년부터는 별도 사업으로 콩나물 가공공장을 만들어 운영 중이다. 또 이 사업으로 ‘배바우마을신문’이 발행되고, 30여 년 전 사라진 장터가 복원됐다.

권역 사업 종료 이후에는 ‘안남배바우공동체영농조합’을 설립, 배바우도농교류센터, 가공사업장, 친환경지원센터, 야외체험시설을 운영하면서 경제사업을 총괄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배바우영농법인은 안남면 주민들이 출자한 법인으로 직접 경제사업을 하면서 안남면 풀뿌리 경제조직의 맏형 역할을 하고 있다. 안남의 생산자조직은 친환경생산자연합회, 로컬푸드생산자회, 정보화마을을 비롯한 풀뿌리 법인들이 있는데, 배바우법인을 통해 옥천살림, 생협, 기타 공동판매처와 거래한다.

안남면에서는 지금까지 권역사업으로 지은 시설들을 하루도 놀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인구도 적고 기반이 취약한 농촌마을에서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머니학교 교장이자 안남배바우공동체영농조합법인을 책임지고 있는 송윤섭 대표는 “군 단위에서 지자체 재정이 들어간 곳이라면 운영비 지원이 따르지만, 면단위에서는 민간이 책임을 지는 구조”라면서 “주민들이 자원활동을 한다고 해도, 운영비의 경우 더 이상 주민들의 십시일반으로는 무리”라고 말했다. 따라서 그는 “경제적 문화적으로 소외된 면단위까지 정부가 챙기지 못한다면,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조직체들이 지속 가능할 수 있도록 조례 제정 등을 통해 인건비 등 운영비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남면은 지난 2018년 기초생활거점육성사업에도 선정돼 5년간 약 40억원 규모의 사업을 진행한다. 여기에는 지역의 숙원인 마을 목욕탕을 비롯해 문화·복지 생활기반 시설을 확충하고, 정주 여건 개선과 면 소재지 기능을 강화하는 사업이 펼쳐진다.

안남면의 사례가 모든 지역의 농촌개발에 적용되는 전범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주민주도의 농촌은 어떻게 가꿔가야 하는 지 핵심 키워드는 있다.

첫째 ‘공생과 연대’다. 폐쇄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열려있고 느슨한 공동체를 만들면서 많은 주민들과 함께 하려 했고 다른 지역과도 끊임없이 연대하려 했다는 데 있다. 두 번째는 ‘협치’다. 행정과 농협 등을 배제하지 않고 계속 요구하고 대화를 통해 필요한 일을 하게 했다. 세 번째는 ‘순환과 지속가능성’이다. 주변 지역의 환경과 농업을 조화롭게 고민하고 지속가능한 농업은 지속가능한 농촌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네 번째는 ‘자치’다. 이 모든 중심에는 주민들이 있다. 주민들이 주인이 되어 삶의 공간을 스스로 기획하고 개척했다는 점이다.

이 사례는 농촌개발 정책이 제대로 추진되려면 행정기관과 컨설팅업체가 아닌, 주민의 자치역량과 민관 협치, 협동과 연대를 중심으로 개혁돼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정민 지역재단 지역순환경제센터장은 “행정에서 정해 놓은 일정과 방식에 따른 일방적인 사업진행이 아니라, 충분한 사전 준비와 사전 역량강화 과정을 거쳐 주민들의 참여와 의견수렴으로 계획이 마련되고 사업이 추진될 수 있도록 사업 추진체계를 전환해야 한다”면서 “읍면 단위 주민자치회 등 주민의 자치력 신장을 기반으로 농촌개발을 추진하고, 지자체 단위의 중간지원조직 육성과 함께 제각각 칸막이로 추진되는 사업과 정책을 읍면 단위에서 융복합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말한다. 구자인 충남연구원 마을만들기지원센터장은 “농발계획, 농촌협약, 농촌공간계획 등이 실효성을 가지려면 읍면 단위의 주민자치 역량을 높이고, 자치단체마다 총괄부서 설치, 중간지원조직 설립, 농어촌정책 기본조례 제정 등 민관협치의 정책전달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민관협치형 추진체계는 대통령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져 주목된다. 농특위는 지난해 12월 본위원회에서 ‘지방자치단체 농어촌정책의 민관협치형 추진체계 구축(안)’을 의결했다. 그 내용은 행정의 통합적 추진체계 구축, 중간지원조직 재편으로 민관협치 강화, 민간의 조직화 촉진과 자치역량 강화, 농어촌정책 추진체계 제도화 등 4대 주요의제와 7대 세부과제다.

“농촌정책 개혁, 행정이 먼저 나서라”
구자인 충남연구원 마을만들기지원센터장 

지역 자치력·자급력 복원 급선무
훈련 반복하면서 주민자치역량 제고
정책 칸막이 없애고 전문인력 확충
중앙 권한, 지방·민간에 이양해야

“이제는 중앙정부도 지자체도 농촌정책 현장의 질문에 대답해야 할 때입니다. 주민 탓을 하면 답이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지역으로 자치권, 예산권, 계획권 등 권한을 이양하고, 책임도 요구할 때 평가가 공정할 수 있다는 겁니다. 시간이 걸린다, 너무 빠르다, 우리 힘만으로 안 된다 등 핑계를 찾는 동안에 농정에 대한 신뢰도는 더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구자인 충남연구원 마을만들기지원센터장은 “농촌에서는 더욱 거버넌스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고, 여전히 개발주의가 주도하고, 주민들은 동원되거나 줄 세우는 대상일 뿐”이라며 농촌정책의 구조적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구 박사는 1980년대 말부터 풀뿌리 주민자치운동의 일환으로 마을 만들기 방법론에 관심을 가지고 서울에서 활동을 하다가 일본 유학을 거쳐 농촌으로 돌아왔다. 2004년 진안군 마을만들기팀장을 시작으로 현장을 지키며 계약직 공무원으로, 활동가로 지자체 농촌마을정책에 관여해왔다.

관과 민간 사이 현장에서 일을 해 오면서 말을 자제해온 그지만, 최근에는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고 있다. “사실 이 얘기는 전부터 해온 것이기도 하지만, 향후 10년이 농촌 살리기의 마지막 기회라는 심정으로 이번만큼은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그동안 마을공동체 붕괴의 책임은 도시중심 지역개발, 수출주도형 경제발전 전략을 추진해온 국가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며 “이런 반성을 전제로 농촌정책을 민관 협치 방식으로, 지역의 자치력과 자급력을 중심으로 재구축하지 않으면 농촌마을의 희망은 없다”고 말했다. “지금 농촌사회는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자치력과 자급력을 잃어버렸는데,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지역이 주도해 지역 내부에 성장 동력을 축적하려는 자급의 힘을 복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오랜 현장경험에서 정책의 칸막이, 현장에서 일할 사람의 부족, 취약한 민관협치 제도적 기반, 읍면 단위의 계획 미비 등 농촌정책 4대 근본문제를 추출하고, 해결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칸막이가 너무 심하고 복잡합니다. 행정의 업무 분장이 공무원 직렬 중심이다 보니 현장 실정에 전혀 맞지 않고, 수요자 주민의 필요를 반영하지 못합니다. 공무원 순환보직제로 현장 전문성도 떨어집니다.” 다양한 종합 계획은 컨설팅기관을 통해 전적으로 수립되고, 수립된 정책도 거의 작동하지 않게 되는 셈이다. 그래서 행정의 업무 조정과 조직 개편, 중간지원조직 설치가 필요하고, 농촌 정책의 전담 부서 신설과 업무 협조 체계, 순환보직제 단점 극복 장치 도입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음은 지역 현장에 ‘일할 사람’이 너무 부족하다는 점이다. “대규모 정책 사업이 매년 반복적으로 시행되고 있음에도 현장에는 활동가, 전문가가 자리 잡을 좋은 일자리가 없습니다. ‘일할 사람’의 전업적인 활동공간으로서 중간지원조직 설치, 임기제 공무원 채용을 적극 장려해야 합니다. 공공성이 있는 민간단체에도 활동가들이 다수 활동할 수 있도록 좋은 일자리를 적극 제공해야 합니다.” 그는 “각종 창업프로그램을 서로 잘 연계, 원하는 사람에게 적시적소에 제공하고, 대규모 행정 사업일수록 인건비 투자를 항상 병행해야 한다”며 “이런 방향으로 지금의 보조사업 방식을 전면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 번째는 민관협치의 제도적 기반이 취약하다는 것이다. 그는 “민간의 주민자치 역량이 부족하다고 탓하지만 사실은 제도적 뒷받침이 없는 것이 더 큰 문제”라며 “주민자치의 역량이 성장할 수 있는 기간을 고려하지 않은 채 당년도 단위 사업에 집중하고, 또 민간에 권한을 제대로 위임하지 않고 보조사업 방식만 남발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행정은 행정의 고유역할을 명확히 하고, 권한을 민간에 과감하게 이양하거나 중간지원조직에 위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읍면 주민 생활권 단위의 공간계획이 미비하다는 점도 근본문제다. 그래서 “농촌정책이 주민들의 ‘필요’를 반영하지 못하고, 정책 융복합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한국사회 기초자치단체의 규모가 유럽이나 미국, 일본에 비해 너무 크고 마을 주민들의 목소리가 정책에 직접 반영되기 어려운 현실”이란 분석이다.

그는 “읍면 행정 단위가 원래 지방자치단체였고, 직접 민주주의가 실천될 수 있는 기초 단위”라며 “이런 역사를 반영, 시·군의 권한이 읍·면으로 과감하게 이양되고, 민간의 주민자치(위원)회를 실질적인 주민자치의 대표조직으로 전환, 다양한 정책사업이 현장에서 융복합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 박사는 “앞으로 지향해야 할 농촌정책 시스템은 무엇보다 ‘민관협치’, 곧 ‘거버넌스’에서 찾을 수 있다”면서 “행정과 민간이 함께 협력해 농촌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민관협치 관점은 이제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대세”라고 했다. “행정은 서비스 제공자로서 민간의 주장을 귀담아 듣고, 민간도 학습 과정을 거쳐 합리적 주장을 해야 합니다.”

그는 “지방으로, 민간으로 권한을 과감하게 이양하고 읍면동 주민자치회 권한을 강화하려는 자치분권의 흐름이 매우 중요하다”며 “현장 전문가와 활동가, 지역 리더들이 모여 농촌정책을 우리 스스로 만든다는 자세가 핵심”이라고 짚었다. 훈련과정을 반복하면서 주민 자치 역량을 키우고, 이를 바탕으로 주민이 주도하는 농촌정책으로 전환돼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길 농정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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