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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40주년 특별기획/2020 ‘성찰과 대안’] “조직 이해관계 매몰되면서 분열···스스로 고립·약화 초래”<1>농민운동, 갈등을 넘어 연대로

[한국농어민신문 이상길 농정전문기자]

정부가 바뀌어도 신자유주의 개방농정은 계속되고 농민들의 삶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농촌은 고령화를 넘어 소멸위기가 거론되는 지경이지만 정부의 농업에 대한 무관심과 농민 홀대는 여전하다. 그렇다면 이에 대응해야 할 농민단체들은 어떤가? 농산물 가격 폭락, 직불제 개편, 개도국 지위 포기 등 현안이 쏟아지고 있지만, 대응은 분산적이고 효과적이지 못하다. 수많은 단체들이 각자의 이해에 따라 분화되면서 농민운동 전체의 약화가 우려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독재정권에 맞서 한국사회 민주화에 기여하고, 신자유주의 개방농정으로부터 농민을 대변하면서 한국 농업을 지켜온 농민운동. 이제 농업의 새로운 위기와 현장의 변화 앞에서 농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국민이 공감하는 운동을 위해 무엇을 성찰하고 고민해야 할지 짚어본다.



◆농민운동의 태동과 성장

1972년 ‘가농’ 출범하면서 본격화
거세지는 시장개방에 연대 모색
90년 전농 탄생 진보적 운동 주도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WTO가 농민을 다 죽인다고 외치며 목숨을 바친 이경해 열사. 전 세계 반세계화 운동의 상징으로 남았다.

농민운동이란 ‘농민이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위해 전개하는 사회 운동’을 말한다.

우리나라 농민운동의 뿌리는 깊지만, 사회운동으로서 농민운동은 70년대 가톨릭농민회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본다. 70년대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유신체제아래서 저임금 수출공업화를 위한 저곡가 정책이 진행되면서 농촌경제가 피폐화되고 식량의 대외의존도가 높아졌다.

가톨릭에서는 1958년부터 산업노동문제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던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안에서 농촌청년부가 1964년에 만들어졌고, 이후 1966년에는 ‘한국가톨릭농촌청년회’라는 농촌청년운동조직으로 독립했다. 이후 농업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보다 과학적이고 조직적인 활동이 필요하다고 판단, 1972년 4월 ‘한국가톨릭농민회’(가농)로 조직을 개편하고 농민운동을 본격화 한다. 1978년 3월에는 전남기독교농민회가 창립됐고, 1982년 3월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기농)이 결성된다.

이 시기 농민운동은 1974년 독일 기독교의 원조로 시작된 ‘크리스찬 아카데미’(원장 강원용 목사)의 농민교육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크리스찬 아카데미는 1974년부터 유신의 탄압을 받는 1979년까지 총 800명의 교육생을 배출했다. 같은 시기 ‘YMCA연맹’도 ‘농촌신용협동조합’운동과 ‘부락개발사업’을 전개했고, 천주교 원주교구가 실시한 부락개발사업, 충북육우개발협회의 부락개발사업도 농민운동의 인재를 키워냈다.

1978년 수입자유화조치에 따른 개방농정이 현실화되면서 1980년대는 신군부가 등장했다. 정부가 경제작물과 축산을 권장하면서 가격파동으로 이어졌고, 개방농정을 틈타 새마을운동중앙회(회장 전경환, 전두환의 동생)의 수입소 파동이 일어나 농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투쟁이 이어지자 신군부는 미봉책으로 ‘농어촌종합대책’을 발표했지만, 미국의 통상압력에 따라 한미 통상협상을 통해 1986년 시장은 더욱 개방됐다.

농민들은 이런 국면에서 가농이나 기농 등 기존 농민조직으로는 투쟁을 조직하는데 한계를 느껴 새로운 ‘자주적 농민조직’의 건설과 사회운동의 연대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농민운동은 1987년 민주화투쟁에 적극 결합했다. 1987년에는 15개 시군에서 ‘독자농민회(이하 독자농)’를 중심으로 ‘전국농민협회’를 결성하면서 농민투쟁은 가농, 기농, 독자농이 이끌게 됐다.

80년대 농민운동은 외국 농산물 수입 저지 및 농산물 제값받기 투쟁을 중심으로 대규모간척농지 분배요구, 농협민주화, 수세폐지·농조해체 투쟁, 의료보장 쟁취투쟁으로 확산됐다. 1989년 ‘고추 전량 수매 쟁취 및 수세 폐지 농민대회’로 불리운 ‘2.13 여의도 농민대회’이후 농민운동은 운동 조직의 통합에 착수한다. 가농과 기농, ‘전국농민협회’와 독자농이 통합된 단일조직인 전국농민회총연맹이 1990년 4월 24일 출범, 현재까지 진보적 농민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 전국농민연대가 주도한 10만 명 규모의 전국농민대회가 2003년 11월19일 서울 여의도 한강 둔치공원과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동시에 개최됐다.


◆농민후계자 조직화와 한농연 

87년 전국농어민후계자협의회 출범
자금지원 중단 등 정부 견제 홍역
90년대부터 UR 맞서 개방 반대투쟁


80년대 이후 농민운동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흐름은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의 활동이다. 농민후계자는 1980년 11월 농어민후계자육성기금법을 제정, 육성하면서 1980년대 후반기에 총 인원이 5만 명을 바라보며 지역별로 다양한 모임이 활동하기 시작한다. 후계자 내부에서는 시군단위 조직을 전국 및 각도단위로 조직화할 필요성이 대두됐고, 이는 1987년 선거 국면에서 직능조직을 잡기 위한 여당의 필요와도 맞아 떨어져 12월 9일 농업기술진흥회관에서 ‘전국농어민후계자협의회’가 출범했다.

그러다 88년 대우경제연구소 이한구 사무국장이 한국경제신문에 농수산물시장을 개방해야 한다는 글을 게재하는 일이 생겼다. 전후협은 이에 ‘대우제품 불매운동’을 전개하는 등 적극 대응, 대우의 공식 사과와 김우중 회장의 유감표명을 받아내는 성과를 거뒀다.

한농연은 이후 조직을 정비하고 1989년에 제1회 전국대회를 농어민후계자-우리는 누구인가?를 주제로 덕유산에서 개최한다. 이 대회는 한농연이 농업의 주요 세력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됐지만, 성장하는 한농연에 대해 후계자 자금 지원 중단과 2회 전국대회 에 대한 방해 등 정부의 견제도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농민단체로서 정체성과 운동성을 확보한 한농연은 90년대부터 UR에 맞서 개방 반대 투쟁에 나선다.

한농연은 이후 UR 반대 투쟁, 농가부채특별법 제정, 마사회 농림부 환원, 협동조합 개혁, FTA, 쌀 협상 대응, 농정개혁 등 농업과 관련된 주요 이슈를 대안 중심으로 주도하면서 농민 권익을 대변해왔다. 한농연은 1990년 전국농어민후계자연합회로, 1996년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로 명칭을 바꾸며 회원 13만5000명의 최대 농민단체로 성장해왔다. 한농연은 농협조합장 선거와 지방선거에 적극 대응하고, 대통령 선거 때마다 각 후보자들을 초청, 토론회를 열면서 영향력을 넓혀왔다.
 

▲ 1993년 2월15일, 전국농민회총연맹과 한국농어민후계자중앙연합회 공동으로 동국대에서 열린 쌀 수입 저지 전국농민대회.


◆시장개방과 신자유주의 농정에 맞선 농민운동

IMF 닥치면서 농가부채문제 심화
2003년 이경해 열사 자결 충격
WTO 반대·FTA 저지 온 몸 맞서


1990년대 이후 농민운동은 WTO DDA의 진전, 무차별 FTA 등 신자유주의 개방농정과 농업구조조정에 대한 대응에 집중해왔다. 90년대 전반기 UR 저지 투쟁은 농민과 시민 학생이 연대하고, 국민들과 정치권의 관심 속에서 진행됐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하자 농민운동은 WTO 특별법 이행, 통합의료보험 실시, 쌀 자급, 협동조합 개혁, 농지보전, 농업재해보상법 제정, 42조원 계획 개선 등을 요구했다.

그러다 1997년말 외환위기로 IMF(국제통화기금) 체제가 닥치면서 농자재 가격 폭등, 농산물 가격 폭락, 농가부채 문제로 농업은 공황상태를 맞았다. 김대중 정부가 집권하면서 정부와 농민단체간의 협치가 시도됐지만, 농가부채문제는 심화되고 근본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농민단체들은 농가부채 해결, 협동조합 개혁, 농정개혁 투쟁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농조, 농조연합회, 농어촌공사 3개 조직이 통합됐고, 농가부채특별법이 2000년 12월 제정됐다.

2001년 11월 카타르 도하에서 WTO의 새로운 협상인 DDA가 출범했다. 첫 FTA인 한·칠레 FTA가 2002년 타결되고,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국회에서 비준됐다. 농민들은 WTO 세계화 반대투쟁, FTA 반대 투쟁에 나섰다. 

특히 2003년 9월 WTO 5차 각료회의를 저지하기 위해 농민투쟁단을 구성, 멕시코 칸쿤 현지에서 집회를 갖는 도중,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2대 회장을 지낸 이경해 열사가 WTO에 반대하며 자결하는 아픔을 겪었다. 2004년~2005년에는 쌀 관세화 개방과 국회 비준을 반대하는 집회가 이어졌고, 2005년에는 쌀 협상 국회 비준 저지 집회에서 전용철, 홍덕표 농민이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사망했다. 

2006년 개시된 한·미 FTA 협상은 2007년 타결됐는데, 농민들은 ‘한미 FTA농수축산비상대책위’를 구성하고 270여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와 연대 투쟁을 이어나갔다. 한미 FTA는 농민들과 각계의 반대 속에 우여곡절을 겪다가 이명박 정부 때인 2011년 11월 국회에서 비준된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인도, EU(유럽연합)와, 박근혜 정부에서는 호주, 캐나다, 중국, 뉴질랜드 등과 FTA가 체결됐다. 박근혜 정부이던 2015년에는 정부가 관세화 방식으로 쌀 시장을 전면 개방했다. 2015년 11월14일, 쌀값 폭락에 항의하고 농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농민대회에 참가했던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물대포에 쓰러져 1년 가까이 투병하다 숨졌다.
 

▲ 2002년 11월13일 사상 최대 인원인 12만여명이 참가한 여의도 전국농민대회. 시민·사회·노동단체까지 합세해 ‘쌀 개방 저지’ ‘한·칠레FTA 반대'를 주장했다.


◆농민단체의 연대, 그리고 분열

거대 현안 때마다 연대 나섰지만
정부, 보상·지원 앞세워 분열 시도
각자 이해 따라 갈등·대립하기도


농민단체의 연대는 어느 한 단체의 힘으로 대응할 수 없는 거대 현안이 있을 때 활발해진다. UR 개방이 본격화된 1992~94년 사이 전국농민회총연맹,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를 비롯한 16개 농민단체를 비롯 시민, 노동단체 등 187개 단체가 연대한 ‘우리 쌀 지키기 범국민대책회의’(상임집행위원장 김성훈, 1994년 ‘우리농업 지키기 범국민운동본부’로 개편)가 반대투쟁을 선도한 역사가 있다.

농민단체간 연대의 사례는 2000년 10월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전국농민회총연맹 등 21개 농민단체가 ‘농가부채특별법 제정을 위한 농민단체협의회’를 구성한 일이다. 1999년 협동조합개혁과정에서 분열됐던 전농과 한농연이 힘을 합쳐 농가부채 해결투쟁에 나섰다는 것은 그 만큼 농민들이 위기상황에 내몰렸음을 말해준다.

2003년 5월, 한농연을 비롯한 전농, 전국농업기술자협회,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한국여성농업인중앙연합회, 전국한우협회, 한국가톨릭농민회, 한국낙농육우협회, 한국유기농업협회가 참여한 전국농민연대가 출범한다. 전국농민연대는 한·칠레 FTA 비준 거부와 협동조합개혁운동을 주도했다.

이어 2006년 3월에는 농민연합이 결성돼 근본적인 농업회생 대책 마련을 위한 대정부 투쟁을 주도했다. 농민연합에는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한국여성농업인중앙연합회, 전국농민회총연맹,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한국가톨릭농민회, 전국농업기술자협회, 한국낙농육우협회, 환경농업단체연합회, 한국4-H본부, 농촌지도자중앙연합회, 새농민회 등 11개 단체가 참여했다.

그러나 농민단체들은 각자의 이해에 따라 분열되는 모습도 보여 왔다. 그 사례가 한·칠레 FTA에 대한 농민단체협의회의 ‘조건부 찬성’ 사건이다. 2003년 11월, 당시 한칠레 FTA 비준을 막기 위해 전국농민연대가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을 때, 농단협 소속 19개 단체 가운데 16개 단체 대표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지원대책을 전제로 한·칠레 FTA 국회비준을 조속히 처리하라”는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FTA로 가장 큰 피해를 볼 수 있는 품목단체들이 포함된 농단협의 FTA 찬성은 보상을 빌미로 한 정부의 끈질긴 회유의 결과였다.

또 하나의 사례는 김대중 정부 시절인 98년~2000년 7월 1일 농협, 축협, 인삼협이 통합된 농협중앙회가 출범할 때 까지 협동조합개혁 과정에서 벌어진 갈등이다. 통합안을 지지했던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를 비롯한 단체들은 협동조합개혁 범농업인연대(협개연)를, 신·경분리를 주장한 전국농민회총연맹 등은 한국협동조합개혁국민연대(국민연대)를 만들어 대립했다. 양측이 사활을 걸고 대립한 결과 협동조합 개혁은 반쪽짜리가 됐고, 이 갈등은 농업계에 큰 내상을 입혔다.

정부는 협치를 말하면서도 끊임없이 농민단체를 분열시켜 왔다. 가장 흔한 방식이 전농과 한농연을 갈라놓고, 종합단체와 품목단체를 분할통치하는 수법이다. 정부 지원을 매개로 단체들을 회유하거나 새로운 단체를 만드는 것도 방법이다.
 

▲ 2008년 이명박 정부의 한미 쇠고기 협상 철회와 한미 FTA 국회 비준 반대를 외치는 농민들.


“개방반대 30년 투쟁 점검…농민들 삶의 문제에 천착해야”

◆농민운동의 현실과 과제

농민 수는 주는데 농민단체는 난립
상층 간부·특정그룹 주도 한계
아집·독선 벗어나 연대틀 모색을


우리나라에는 30~40여개의 농민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농민단체 중에서도 설립 배경과 목표에 따라 사회운동으로서 농민운동을 지향하는 단체와 회원농민의 권익증진을 위한 단체는 성격이 다르다. 전농과 전여농을 제외한 대부분의 농민단체는 정부 또는 산하기관, 농협이 추진한 특정사업 및 품목과 관련이 있는 농민들이 결사체를 만든 것이 특징이다. 편의상 종합단체, 품목단체, 학습단체 등으로 분류하거나 이익단체, 생산자단체, 관변단체, 농권운동 단체, 농민운동 단체로 구분하기도 한다.

농민단체는 그동안 나름의 역할을 해 왔지만, 농업환경의 변화에 따라 조직도 변화하는 시기에 왔다. 90년대 초 1000만명에 이르던 농민은 개방농정과 농업구조조정 속에서 2018년 231만명으로 줄었다. 반면 농민단체는 난립해, 1명의 농민이 여러 곳의 회원으로 가입하는 상황이다. 지금도 정부 정책 사업과 농협의 필요에 따라 직능단체, 품목단체가 생기고 있는 실정이다. 청년농업인 조직도 여럿이고, 여성조직 가운데는 중년여성농업인CEO연합회까지 생겼다. 이런 상황에서 연합조직도 여럿으로 나뉘어 농민의 길(5개), 농축산연합회(28개), 축산관련단체협의회(26개), 한국농업인단체연합(15개)에 중복 가입된 단체도 적지 않다.

반면 전체 농민대중을 대변해온 농민운동 조직은 고령화와 오랜 투쟁으로 인한 피로감, 재정 부족으로 인한 고질적인 운영난, 지역조직의 약화에 시달리고 있다. 농민운동의 위기는 오랜 신자유주의 개방농정에 의한 농업의 쇠퇴, 조직 내부의 역량 부족도 원인이지만, 그동안 농민단체의 약화와 분열을 조장해온 역대 정부의 작용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농민운동에만 변화와 혁신의 요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87년 이후 성장한 노동, 농민, 시민사회 전반의 과제다. 87년 체제로 불리는 사회운동의 방식이 30년이 넘도록 변화하지 않고 지속돼온 탓이기도 하다. 중앙에 집중된 활동, 대안보다는 반대에 익숙한 투쟁방식, 조직 내부의 인력 육성 부재, 현장과의 괴리, 조직 이기주의가 그것이다.

지난해 12월12일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가 주최한 ‘농민운동 조직의 역할과 과제’ 심포지엄에서는 농민운동의 조직과 실천과제를 놓고 많은 고민이 논의됐다. 장상환 경상대 명예교수는 “농민운동의 주체를 일부 부농이 아니라 다수의 중소농 중심으로 강화하고 시군단위 조직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농민단체들은 ‘다수 농민을 대변하는 자세’와 ‘특혜가 아니라 합리적인 국가 및 농정운영을 요구하는 면모’를 바탕으로 회원 확대 노력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또 “농민운동 단체 내부의 조직 내 민주주의를 실천, 상층 집행간부 개인과 특정 그룹이 조직을 주도하는 것을 극복해야 한다”면서 “대중운동보다는 정부와 교섭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할 것이 아니라 대중운동을 바탕으로 정부와 교섭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부 단체가 제도권 내로 편입되는 것, 일부 인사가 권력에 참여하는 것으로는 농민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농민조직의 정치활동과 관련, “필요에 따라 요구안을 수용하는 정당과 정책 제휴를 할 필요는 있지만, 특정 진보정당과 고정적으로 연계되는 것은 다양한 농민들을 포괄하는데 지장을 초래, 오히려 정치적 영향력을 축소시킬 수 있다”며 “농민조직 내부에서 다양한 정당에 대한 지지를 허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경남의 한 농민운동가는 “농민운동이 신자유주의 개방농정 등 메타테제에 대한 저항은 강했지만, 농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문제, 생태, 환경, 소비자 등 미시적인 견해에 대해서는 터부시함으로써 고립을 자초한 측면이 있다”면서 “아집과 독선에서 벗어나 자기 정체성에 충실한 조직으로 거듭나고, 연대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과 함께 농업의 가치를 공유하고 공동체를 회복하는 대안농업(농식품) 운동이 활성화 돼야 한다는 견해도 많다. 농민운동가 출신인 이창한 지역재단 기획이사는 “이미 세계는 식량주권을 뺏으려는 세력과 식량주권을 실현하려는 세력의 이중운동이 진행 중”이라며 “농생태를 포함한 식량주권 운동, 학교 및 공공급식, 로컬푸드 등 한국사회 보편적 이익을 추구하는 대안농업운동으로 대중적 흐름을 형성, 거대한 전환을 이뤄내야 한다”고 제안한다.


●송남수 전 전국농민연대 대표
“작은 차이 극복…시대적 쟁점 공유해야”

DDA·FTA 등 긴박한 상황 속
전농·한농연 개별 대응으론 한계
2003년 전국농민연대 출범

뿔뿔이 흩어진 농민단체 아쉬움
마음 열고 단일대오로 가야
지역의 변화에도 적극 대응을

 

지난 2003년 5월19일 농민단체 연대조직인 전국농민연대는 출범 선언문에서 “작은 차이를 넘어 대동단결한다”고 선언하고 활발한 운동을 펼쳤다. 이런 연대의 정신은 지금도 농민운동에 시사점을 주고 있다. 당시 한국가톨릭농민회 회장으로서 전국농민연대의 상임대표로 농민운동을 이끌었던 송남수 전 대표를 전북 장수군 자택에서 만났다.

-2003년 전국농민연대의 상임대표를 맡으셨지요. 농업현안이 굉장히 많을 때인데요, 농민단체 연대조직이 만들어진 배경은 무엇입니까?
“당시는 DDA 협상이 출범한데 이어 최초의 FTA인 한 칠레 FTA의 국회 비준 문제가 터진거예요. 농민단체들이 위기감을 느끼게 된 거죠. 생자단체들이나, 운동권 단체들이나 모두 그랬어요. 이런 큰 문제에 대응하려면 개별적 투쟁을 해가지고는 안되지 않냐 해서 농민연대를 구성하게 된 거죠. 그래도 정부 눈치를 보는 생산자단체들은 빠지고 한농연, 전농 등 9개 단체로 시작했어요.”

-다양한 단체들간 연대는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당시 전농은 정현찬 의장, 한농연은 서정의 회장이었어요. 그리고 강춘성 전국농업기술자협회 회장하고 나, 이렇게 네 사람이 축이 돼서 연대를 주도했어요. 그 네 사람은 어떻게 보면 전부터 농민운동의 동지적 역할을 해왔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마음이 통해서, 쉽게 서로 이해하고 연대할 수 있던 조건을 만들어 간 거죠. 전농이나 한농연이 그 때는 개별적인 입장만 가지고 평행선을 그을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긴박하잖아요. DDA, FTA를 전농이나 한농연의 조직만으로는 대응하기 버거웠고요. 그런 것들을 서로 이해하는 측면이 있었지요.”

-당시 전국농민연대와는 달리 품목단체들 중심의 전국농민단체협의회는 FTA 찬성 입장을 내기도 했지요?
“정부에서 농민연대에 가담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 엄청나게 회유를 했어요. 일부 품목단체라든지 그런 쪽에서는 그런 것을 이용해서 자기들 이권을 찾았죠. 어떤 품목 단체는 자기의 조직을 유지하면서 조직원들에게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게 해주는 그런 역할에만 치중돼 있어요. 조직의 한계죠.”

-현재 농민단체는 진보와 보수, 종합단체와 품목단체 등으로 나뉘어 있는 상황입니다.
“제가 보기 안타까운 게, 농민운동이 시대적 쟁점에 대한 공유가 안 돼 있어요. 자기들의 조직 이해 때문에 전체가 안 보이는 거예요. 쟁점에 대한 공유를 할 수 있도록 집행부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투쟁을 하더라도 단일대오로 투쟁을 해야 합니다. 또 이슈를 내 놓더라도 합의된 내용 안에서 나와야지, 이 단체 저 단체 이슈가 다르다면 자연적으로 힘은 약화될 수밖에 없잖아요.”

그는 농민단체들이 힘을 모으려면 큰 이슈를 중심에 놓고 연대를 모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예를 들면 개도국 지위 문제를 큰 이슈로 내걸고, 공통분모가 있는 큰 것 아래에 컨텐츠로 쌀 직불금 문제, 품목 가격 하락 문제 이런 것을 담아서 투쟁을 조직해야 돼요. 그래야 응집력을 가지는 겁니다. 큰 그림을 그려놓고 그 안에 담아낼 수 있는 것을 놓고 합의를 해야 되는데, 큰 그림을 포기하면서 각자 이해관계 있는 이슈에만 치중하는 것이 되다 보니 아무래도 운동이 약해지죠.”

-2003년 9월에 WTO 반대와 5차 각료회의 저지를 위해 멕시코 칸쿤에 다녀오셨지요.
“그 때 농민연대 상임대표로서 칸쿤 농민투쟁단으로 갔어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이경해 열사가 애초 의도했는지 모르지만, 그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철책 이쪽에 이경해가, 반대편에 서정의 회장이 올라가서 프랑카드를 걸려고 애썼는데, 거기서 툭 떨어지는 거야. 바로 병원으로 갔는데, 살리지 못했어요.”
칸쿤 한국투쟁단은 이경해 열사를 기리면서 현지에서 투쟁을 이어갔고, DDA 협상 진전을 위한 WTO 각료회의는 합의 없이 무산됐다. “이경해 열사가 세계 농민운동에 남긴 시사점은 큽니다. 세계의 농민들이 그를 보면서 ‘우리 스스로 우리 농업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만드는 계기가 됐어요. DDA 협상도 직접적으로 우리가 다 막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된 겁니다.”

-농업 농촌의 쇠퇴, 고령화와 더불어 농민운동도 고비를 맞고 있습니다.
“지역에 사람이 없는 게 제일 문제입니다. 농민운동이 지역인재, 운동가와 싱크탱크를 양성하고 지역의 변화에 적극 대응해야 합니다. 마을 만들기나 신활력플러스, 농업회의소 등 정부 정책도 진화하는데, 농민운동가들은 관변화를 우려해서 이것에 거리를 두기만 해요. 예를 들어 농업회의소가 생겨 농민운동을 위축시키고 관변화 될 것이 우려된다면, 그렇게 되지 않도록 확실한 장치를 만들고, 지역농민운동의 관점에서 그것을 스스로 통제할 역량과 인재를 키워야 합니다.”

송남수 대표는 현재 장수군 마을만들기 중간지원조직인 (사)장수지역활력센터의 이사장을 맡아 농촌의 마을공동체, 공동체적인 삶을 복원하는 일에 힘을 보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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